2015. 11. 10. 14:43

 



손가락 끝이 퉁퉁 부었던 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끝에 차오른 누런 고름을 바라보며 고통의 원인을 알고도 손쓸 수 없었던 그 밤에 나는 다급하지만 무력한 인터넷 검색으로 ‘생인손’이라 병명만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검색 하고 또 검색해도 병원에서 시술을 받는 것 외엔 그 어떤 방법도 없다는 ‘조갑주위염 Paronychia’. 그날 밤 10년동안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병원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손끝의 고통이 고름과 함께 차오를만큼 차올라 손끝을 뚫고 나올 것 같았던 그 밤에 내가 다급하게 찾았던 것은 바늘이었다. 바늘만 있으면 이 고름을 터트릴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이 통증도 조금 가라앉겠지. 아무리 뒤져봐도 집엔 바늘이 없었다. 편의점으로 달려가 사온 바늘로 누런 고름으로 차 있던 손끝을 찌르지 못했다. 어디라도 찔러야 했기에 붉게 부풀어오른 부위를 찌르고 나서야 다급함 때문에 내가 잠깐 눈이 멀었음을 따끔하게 알게 되었다.  

 

무엇이 나를 눈멀게 했나. 부풀어 오른 고통일까. 검색할수록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던 불안감 때문일까. 아니다. 그 밤에 나를 눈멀게 한 것은 간절함 때문이다. 간절한 사람들이 오늘도 뒤늦게 다급한 검색을 하고 있지 않은가. 검색을 하면서 간절함의 크기를 한없이 부풀려 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늘로 상처 부위를 찌르는 눈먼 자가 되고 있지 않은가. 간절한 인간, 간절하게 어리석은 인간. 간절함 앞에서 우리는 어리석음에 대해 침묵하고 간절한 인간을 그저 위로 한다. 간절함 앞에선 어리석음만 번성할 뿐 누구나 말없이 침묵한다. 간절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 어떤 구원의 손길도 자아가 쌓아올린 간절함의 성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한다. 간절함에 중독된 사람들이 서로의 간절함에 뒤엉켜 넘어지기를 반복한다. 말없이 어리석은 세계.  

 

간절한 인간. 그건 오랫동안 간절함을 어떤 미덕이자 가치로 삼아온 나를 호명하며 깨우는 이름인 것만 같다. 간절하게 말하고자 했으며 간절하게 쓰고자 했고 간절하게 만나고자 했다. 그 모든 간절함을 모짝 어리석음이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간절함은 한사코 반성하려 하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환하게 알겠다. 간절함은 생활이 아니라 고백에 가깝기 때문이다. 간절함이 그 어떤 개입도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다급함에 있지 않다. 간절하다는 것은 간절해졌다는 것이고 그건 간절함에 이를 때까지 손(넋) 놓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과정을 다급해져버린 사정으로 무마해버리는 일이 간절함에 감춰진 속뜻일 것이다. 고백은 간절함을 밑절미로 하고 있기에 일방적이고 다급하며 끝내 어리석다. 그 어리석음을 영영 반성하지 못하고 간절함의 자기 감옥 속에 유폐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릴 때 간절한 인간이 손뻗어 다급하게 잡아채는 것은, 마치 간절함의 능력으로 붙들었다 착각하게 하는 것은 간절한 인간에게 손내민 간절한 종교이거나 간절한 자본이다.  

 

도리없이 그 앞에서 멈춰서게 되는 간절함이 있다. 애원한다는 것, 말이 간절함으로 전달될 때 가지게 되는 힘이 있다. 그것이 잠깐의 착각이라고 해도 간절함은 말을 소중하고 귀하게 만든다. 그러나 말의 소중함과 귀함이, 다시 말해 말의 잠재력이 간절함의 순간에만 쓰여야 하는가 되묻게 된다. 그건 말의 가능성을 간절함이라는 폐쇄 공간에 묶어두고 감금시키는 일이 아닌가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불현 듯 도착한 간절한 말을 수락하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을지라도 간절함의 절벽에 매달려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말’을 구조할 수 있는 방법 또한 고안해내야 하지 않을까. 간절함 앞에서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납작 엎드려 있는 간절한 말을 일으켜 세우는 온기 있는 응답, 현명한 개입, 근기 있는 비평은 어떻게 가능할까. 간절한 말 앞에 서는 일은 서둘러 비판하고 나무라는 ‘판관의 자리’가 아니라 응답-개입-비평을 건네며 말의 잠재성을 발굴하고 일으켜 세우는 ‘가능성의 자리’이기도 하다.  

 

글(쓰기)은 언제나 말(하기)의 즉각성과 현장성에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간절함의 영역에서라면 말이 아닌 글(쓰기)을 통해 품을 수 있는 희망도 있을 법하다. 웬만해선 글은 간절해지지 않는다. 아니 간절해질 수 없다. 글쓰기는 언제나 현실이라는 현장과 낙차(온도차)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낙차가 번성하는 간절함의 세계에서만큼은 가능성이다. 간절할 수 없다는 ‘한계’와 간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리’는 등을 맞대고 있다. 글쓰기를 ‘자기표현’의 수단이 아닌 간절함의 절벽으로 내모는 '세속의 어긋남을 어긋내는 수행성의 양식'(김영민)으로 배치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과 고백은 ‘자아’ 속을 유영하고 옮겨다니며 끝없이 자기복제를 통해 번성하는 것이라면 수행성은 작은 변화를 일구는 ‘조용한 노동’이다. 글쓰기는 ‘자아’를 단박에 삼켜버리는 간절함이라는 파도를 뚫고나가려는 결기이며 간절함의 세계로부터 멀어지려는 결별의 노동이다.  

 

생활 또한 간절함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영역이지 않은가. 생활은 간절함이라는 폭풍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간절함에 기대지 않고 소중히 할 수 있는가, 정성을 다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일상적인 수행성으로 무심히 답하는 일. 매일매일의 생활이 바로 그 일을 묵묵히 하고 있다. 간절함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다급함으로 내달리는 간절한 종교나 자본이 아니며 애인이나 선생도 아니다. 묵묵하기에 번성하지 않고 다급하지 않으며 내달리지도 않는, 그런 이유로 표 나진 않지만 끊임없이 뒤돌아보게 하고 반성으로 우리는 이끄는 각자의 생활이라는 영역이다. 붙드는 것이 남김없이 소비하고 순식간에 타올라 소진시켜버리는 일이 아니라 매만지고 일구는 수행성의 한 양식이 될 때 생활을 돌보는 일을 일러 간절함이라는 어리석음의 세계의 항로를 소리없이 바꾸는 노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생활-글-쓰기 모임> 2기 2회 여는 글 

 

 

 

릴riil

갖은 불화 속에서 언제라도 '잘 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바람을 품고 크고 작은 모임에 관여하고 또 간여하고 있다. 읽고 쓰는 것과 먹고 자는 것을 '일'이 아닌 '힘'으로 전환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누구나 할 수 있는 능력임을 증명하고 알리는 데 애쓰고 있다


2기 2회 포스터, YKS

모든 말이나 글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쓰여있지만, 타인이 그것에 담긴 모든 의미를 보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결국 시간과 노력을 들여 풀어내야하는 암호문 같은 글들과 말들이 오고가게 되는 장소에서 잠시간의 머뭇거림과 느려짐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생활에서도 그러한 암호를 풀어야만 열 수 있는 자물쇠 걸린 문들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풀기도 전에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나요?'하며 방향부터 찾게 되는 '간절함'들을 한 번 느릿느릿 지워보았습니다. 남은 자리에는 잔잔한 물결만이 자신의 방향으로 꾸준히 흐르겠지만, 잊힐만할 때에 간절함은 또 등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