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24. 13:46



 

뒷걸음질 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버티는 데 열중하며 내내 내몰리기만 하는 시간이 잦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면 온몸이 경직되어 절벽을 구르고 있는데도 여전히 버티고 있다 착각하며 한참을 더 구르게 된다. 걸음을 내딛는 것이 아니라 구르기라는 가속력에 스스로를 의탁하게 되는 것이다. 예민하고 민감한 성정은 내가 파놓은 구덩이 안에서만은 이상하리만치 무디고 미련하기가 이를 때가 없어져 몸이든 마음이든 어디 한군데가 바스라지고 나서야 구르기를 멈추고 겨우 바깥으로 나오곤 한다. 다 내 어리석음 탓이리라, 홀로 되뇌며 몸을 털고 일어나 다만, 걷는다. 뜻한 바가 있어 걷는 게 아니다. 다만, 걷는다. 그렇게 걷다보면 넘어지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치기를 반복하던 굴레가 세속의 구조가 아닌 어리석음의 덫이었음을 나직하게 알게 된다. 넘어지지 않기 위한 뒷걸음질을 멈추고 어리석음을 향해 걷는다. 

 

누구도 따르지 않고 누구도 따라오지 않는 산책을 하다보면 오랫동안 홀로 ‘재활’ 하고 있었음을 도리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건 깨침이라기보단 수락에 가까우며 다행스럽기보단 처연하고 쓸쓸하다. 이정표 없이 헤매던 이가 몸에 난 상처가 아물어가는 흔적을 매만지며 위안을 삼는 것과 비슷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아지고 있다는 유일한 증표가 아물고 있는 상처 밖에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 여전히 홀로 있음을 가리키는 표지일 따름이다. 그러니 재활이란 쓸쓸하지만 고요하게 고독의 문을 열고 저 바닥 아래로 내려가 영도(零度)에 이르러 다른 길을 뚫어내는 경로를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고립의 수렁에 빠져 쳇바퀴 돌 듯 요란을 떨면서도 자아라는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빠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아무 일 없이 나아진다는 것은 절망이다. 

 

앞으로든 뒤로든 고꾸라져 엎어져 있는 우울이나 제가 싼 똥을 짓이기고 앉아 짐짓 어깃장을 놓는 염치없는 짓과 달리 재활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귀한 일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재활은 정직하고 바르다. 제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재활은 버팀이라는 견딤의 의지에 방점을 찍고 있는 제자리걸음에 가깝다. 몸살을 앓고 난 뒤의 한시적으로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잠깐의 산뜻함, 이내 휘발되어버리는 착각의 순간을 어루만지며 탐닉하는 것으론 ‘뒷걸음질의 수렁’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목적(지) 없이도 충만했던 산책 속에서 나는 ‘재활’이라는 어휘를 생활에 내려앉힐 수 있었다. 처연하고 쓸쓸하게 절망하는 재활이라는 걸음에 익숙해져도 괜찮은가. 잠깐 허락되는 목적 없는 걸음으로 더러는 가닿기도 하고 더러는 스치고 지나게 될 사유의 편린이 모짝 재활로 흘러들어도 좋을까. 그건 익숙한 걸음을 매만지며 탐닉하는 일이다. 그때 산책은 목적지)에 계류된다. ‘재활’이 아닌 ‘회복’으로써의 걸음, 제자리걸음이 아닌 미지의 걸음, 좌절하되 끝내 배우는 걸음, 그런 걸음 속에서만 희망을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아직 몸으로 익히지 못한 ‘회복’엔 능동적인 힘의 정서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회복은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행위이며 그 미지의 영역에 다가서는 일에서 나는 행위의 창조적인 역동성을 전달받게 된다. 그렇게 ‘인간은 회복하는 존재’라는 태도로 예술—존재론의 입지를 다진 오에 겐자부로에 말에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재활하는 인간의 의지 또한 가치 있는 것이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내어 끝내 이겨내고자 하는 힘이란 속절없이 ‘안간힘’으로 수렴되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재활엔 머무름과 고착의 정서가 짙게 드리우고 있음 부정할 수 없다. 오에 겐자부로에게 ‘회복’이란 쓰는 자라는 작가로서 대면하게 되는 자기 한계로서의 역경과 가족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시간 속에 불청객처럼 틈입하는 예측불가능한 외부성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인 사적 이력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소설뿐만 아니라 그가 쓰는 거의 모든 글이 자신이 살아낸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점을 환기해본다면 오에의 ‘회복’이란 고난의 극복이나 예술적 성취 등 ‘해결’이나 ‘통합’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상처받은 사람은 걷는다.’(김영민) 상처란 불가항력적인 힘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무(기)력의 흔적이 아니라 자본을 앞세워 이 세계를 겁박하며 군림하는 갖은 체제를 예민하게 인지하고 있는 각성의 흔적이다. 상처받은 사람의 걸음, 회복을 향한 산책이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화해’라는 장소다. 회복은 ‘행위 하는 능력’의 피할 수 없는 곤경인 행한 것을 되돌릴 수 없다는 무능력, 다시 말해 인간 행위의 조건인 환원불가능성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용서하는 능력(한나 아렌트)과 다르지 않다. 회복이라는 행위에 깃들어 있는 ‘능동적인 힘’은 ‘상호성’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은 타인의 있음으로부터 성립되는 ‘다원성’에 의존하고 있음을 뜻한다. 회복은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멈출 수밖에 없던 자리도 다시 돌아가는 일(재활)이 아니라 돌아가되 다른 자리로 향하는 일, 이행(移行)하는 일이다. 회복은 (나를) 버티는 제자리걸음과 달리 ‘나(자아)’ 바깥으로 나가는 걸음이며 홀로 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타인에 기대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상호성의 체험을 동력으로 하는 걸음이다.

 

상처받은 사람의 걸음은 재활에서 회복으로 건너가는 매끄러운 이행이 아니라 재활과 회복 사이를 비규정적인 방식으로 구르는 일에 가깝다. 우리가 매번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나약함이나 어리석음에 의해 어떤 수렁에 빠지거나 덫에 걸린 형국을 가리키는 것일 테지만 한편으론 저 스스로도 모르는 방향으로,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분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산책은 목적 없이 어지럽게(散) 흩뿌려진(散) ‘어떤 글쓰기’의 육체성을 가리키는 은유이기도 하다. 생활-글-쓰기는 ‘재활’에 다다르면 이내 ‘회복’을 향해 움직인다. 도리없이 뒷걸음질 치기를 반복하며 넘어지지 않게 애쓰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길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누구의 뒤를 따르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따라올 수도 없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렇게 없는 길을 향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걸음(산책) 없이는 불가능하다. 힘겹게 닿았다고 해도 재활의 자리는 목적지가 될 수 없다. 끝내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일이 ‘의지’의 일이라면 그 의지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돌이킬 수 없이 새겨져 있는 경험, 바로 상호의존적인 힘의 진동을 가리킨다. 제 걸음으로 회복을 향해 이곳을 넘어갈 때 그 힘은 온전히 ‘내 것’이면서 온전히 ‘네 것’이기도 하다. 내 힘으로, 동시에 네 힘으로 다만, 걷는다. 재활에서 회복으로 몸을 '끄-을-고' 넘어간다.

 

<생활-글-쓰기 모임> 2기 3회 여는 글

 

 

 

 

릴riil

갖은 불화 속에서 언제라도 '잘 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바람을 품고 크고 작은 모임에 관여하고 또 간여하고 있다. 읽고 쓰는 것과 먹고 자는 것을 '일'이 아닌 '힘'으로 전환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누구나 할 수 있는 능력임을 증명하고 알리는 데 애쓰고 있다


2기 3회 포스터, YKS

얼마전부터 손에서 무언가를 떨어뜨려 몸에 이런 저런 상처가 생기고 있습니다. 상처들을 관찰하다 놀라게 되는 것은, 어떠한 상처를 받았을 때 방어적으로건 적극적으로건 스스로를 원상태로 복구시켜놓으려는 힘이 몸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관계나 마음도 마찬가지로 어그러지고 망가져버린 듯한 상태라해도 특정한 방향을 마음에 품고 집중하고 있지 않으면, 저 스스로는 안정화된 상태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번 포스터에는 우리 몸에 내재된 기능 중 하나인 착시를 일으키는 이미지를 담았습니다. 착시는 외부의 공격을 예방하기 위한 차원에서 발달된 기능이라고 합니다. 회복의 단계를 넘어선다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예비'로서 주변의 변화를 미리 내다보는 단계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멈춰진 이미지이지만 잠시라도 방심하면 저마다의 방향으로 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는 듯했던 주변의 많은 것들과 자기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나가고 있는지를 착시로나마 내다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