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사회 전체의 위생을 강화하면서 이른바 시민병원을 설립하던 시기에는 조산아나 기형아, 뇌수종, 이상발달 장기 등을 의학표본으로 쓰기 위해 보관하고 때때로 일반인에게도 공개하는 박물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포체험관을 운영하는 병원이 많았다."

-p.18


어느 여름 wellcome collection의 전시에 이끌리듯 들어갔던 기억이 났다.(전시에 충격을 조금 받은 후에 여기는 대체 뭐하는 곳인가 찾아보니 대부분 의학, 몸, 생명 등과 관련된 이야기들과 예술 등을 접목시킨 전시들을 주로 하는 곳이었다.) 그 전시의 제목은 'skin'이었고, 역사적으로 '피부'에 대해 다루어온 방식들, 해부도들과 같은 일반적인 사료는 물론, 문신을 새긴 해적의 피부를 박제한 것이나 실제 인체 표본들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모두의 몸에 있는 것인데, 해체하고, 분리하니 너무나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일반적인 장소와는 언제나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고, 언제나 조금은 다른 것들이 놓여있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 어린 시절 처음으로 보았던 알타이 미라에 대한 기억, 데미안 허스트의 천 년


"특히 병이 들어 기형적으로 성장한 것들이나 병적이라는 점에서는 조금도 뒤지지 않는 왕성한 발명능력으로 자연이 자신의 지도 안의 모든 빈 곳들에 채워넣은 온갖 기괴한 것들에 우리의 관심이 주로 쏠려 있기 대문에 우리는 낙원을 꿈꿀 용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의 자연 연구 역시 한편으로는 완벽하고 합법칙적인 체계를 묘사하는 데 이르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괴상하고 기이한 행태 탓에 눈에 띄는 피조물들에 비상한 흥미를 느낀다."

-p.31


-주세페 아르침볼도


p.76-77의 사진과 청어


"...아니면 이는 단지 복음사가가 만들어낸, 돼지가 불결하게 된 원인을 전해주는 우화에 불과한가? 잘 생각해보면 이 우화는 우리가 우리의 병든 정신을 항상 우리 자신보다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얼마든지 파괴해도 좋다고 여기는 종에게 거듭하여 떠넘긴다는 뜻이 아닌가?"

-p.84


"계절이라고 해봐야 하얀 겨울과 초록 겨울, 이렇게 딱 두 가지뿐이다. 구 개월 동안 살을 에는 바람이 북극해에서 내려온다. 온도계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바닥으로 치닫는다. 끝없는 암흑이 사방을 뒤덮는다. 초록 겨울에는 비가 그치지 않는다. 진흙이 문틈을 파고 집 안까지 쳐들어온다. 시체와 같은 경직이 끔찍한 쇠약으로 넘어간다. 하얀 겨울에는 모든 것이 죽고, 초록 겨울에는 모든 것이 죽어가는 중이다"

-p.127


하얀 겨울에는 모든 것이 죽고, 초록 겨울에는 모든 것이 죽어가는 중이다. 라는 말 속에는 일기예보와는 다른 경험과 감정이 가득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계속 생각이 날 것 같은 문장이라 페이지를 외워두었다가, 오늘에서야 메모로 옮긴다. 


"그녀들이 하루 종일 꿰매어 만든 것들을 대개 다음 날이나 그다음날이면 다시 조각조각 풀어놓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들이 머릿속에서 너무나 비상하게 아름다운 어떤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필경 완성된 작품에 실망할 수밖에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p.250


완성은 진행되어오던 것들에 대한 만족,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어질 종료를 의미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킨 섬 같은 곳에서 머무는 이들이 붙들고 있는 마지막 희망은 스스로 만들고-파괴하고-만들고-파괴하지만 절대로 완성하지는 않는 일련의 행동에 깃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할 뿐이다. 


"나는 주인이 그를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의무의식 때문에 집사가 목숨을 부지했던 것인지, 아니면 기력이 소진한 하인이 죽자 그의 도움 없이는 단 하루도 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종조부가 즉시 정신을 놓아버린 것인지 자주 생각해보곤 했지요."

-p.257


어둠과 빛, 선과 악, 폭력과 평화, 뜨거움과 차가움, 가벼움과 무거움 같은, 상대가 있어야만 설명될 수 있는 개념들이 있다. 짝을 이룬 둘 중 하나가 사라진다면 나머지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게 아닐까. 극과 극처럼 보이지만 그렇기에 절대적으로 의존적일 수 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p.259


"회색 아스팔트 길의 가장자리, 풀줄기 하나하나를 떠올리고, 귀를 뒤로 젖히고 공포로 표정이 굳은, 어딘가 갈라진 듯하고 기묘하게 인간과 닮은 얼굴을 가진 토끼가 은신처에서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고, 도망가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공포로 거의 머리에서 빠져나올 듯한 토끼의 눈을 보고, 그리고 토끼와 하나가 된 나 자신을 본다."

-p.276


글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이 동일시하게 되는 여러가지 대상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이 토끼였다. 중년이 넘어선 나이의 신사일 것이 분명한 주인공은 대체로 고요하게 여러 장소들을 바라보고 느리게 걷는 것이 행동의 전부처럼 느껴지지만, 이 여정을 이어나가는 동안 마음 속으로는 저 토끼와 같은 순간들을 수차례 경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사회의 본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가 남겨놓은 금속과 기계의 쓰레기더미 사이를 돌아다니는 미래의 이방인처럼 나 또한 도대체 어떤 존재들이 여기서 살고 일했는지, 벙커 안의 원시적인 장비들과 천장 아래의 철제 궤도들과 아직 군데군데 타일이 붙은 벽에 걸린 괭이들, 쟁반 크기의 물뿌리개, 승강장과 하수구 따위들이 어디에 쓰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p.278-279


"주지하다시피 조명의 증가와 노동의 증가, 이 두 가지는 서로 평행선을 그리며 나타난다. 우리의 시선이 도시와 근교 위에 걸린 창백한 반사광을 더이상 관통하지 못하는 지금, 18세기를 떠올려보면, 산업화 이전에 이미 적어도 특정 지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련한 몸이 나무틀과 살로 조립해놓은, 추가 매달리고 고문장치나 우리를 연상시키는 베틀에 꽁꽁 묶여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이 기이한 공생은 아마도 비교적 원시적인 그 형태 덕분에, 우리가 오직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기계에 묶여 있어야만 지상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음을 이후에 등장한 다른 모든 공업형태들보다 더 분명히 보여준다."

-p.330-331


"거의 심야에만 찍어 지독하게 어두운 청어 영화와는 달리 양잠업 영화는 실로 눈부시게 환한 빛으로 충만했다."

-p.340


모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그래서 어둡게만 느껴지는 수많은 것들을 밝혀나가는 과정이 문명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가장 상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순간이 있다. 세계사 시간, 현생인류의 진화 과정을 다루는 대목에서 네안데르탈인이 불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다.


잘 보이지 않는 나무들이 베어지는 것(혹은 전염병으로 인해 속부터 썩어가는 것), 어두운 피부의 사람들을 경계로 몰아가는 것, 어둠의 시간을 밝히는만큼 노동이 증가하는 과정 등등 이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파괴와 관련된 많은 장면들은 비가시의 영역을 가시의 영역으로 바꾸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환하게' 만드는 행동은 탐구자의 지평을 열어주고 식견을 쌓는 데에 도움을 주지만, 그가 인식하건 인식하지 않건 간에 그만큼의 어둠을 잃게한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준다. 어둠이 반드시 악은 아니다, 나무 그림자가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악이라면, 뙤약볕에 쫓기고 있는 여름 날의 사람들이 피할 곳은 지구상에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에는 확실하게 유용한 동물이기도 하지만, 수업 교재로서도 아주 이상적이라고 덧붙였다. 아무 경비를 지출하지 않고도 원하는 수만큼 얻을 수 있고, 아주 "온순한 가축"이어서 우리나 사육장 없이 키울 수 있으며 그 모든 발달단계에서 아주 다양한 실험실시 조건(무게나 크기 측정과 같은)을 위해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곤충의 몸의 구조와 특성들을 관찰할 수 있고, 순치 현상과 퇴화 돌연변이, 인간을 훈육하는 데 필요한 성과검사의 기본조치들, 인종적 변질을 막기 위한 선별과 박멸 등을 누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 여기서 누에들을 죽이는 방법은 그전에 흔히 그랬듯 고치를 햇볕에 내다놓거나 따뜻한 오븐에 밀어넣는 것이 아니라 계속 물이 끓는, 벽으로 둘러싼 세탁용 가마솥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p.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