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애란 미묘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상을 지배하고, 어떤 이들은 그 세상이다. 어느 미국인 백만장자, 카이사르 또는 나폴레옹이나 레닌, 작은 마을의 사회주의 지도자 사이에는 질적 차이는 없고 양적 차이만 있다. 그들 아래에는 우리같이 눈에 띄지 않는 이들, 즉 경솔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학교 선생 존 밀턴과 방랑자 단테 알리기에리, 어제 나에게 우편물을 가져다준 배달원이나 잡담을 들려준 이발사, 바로 오늘 포도주 반병을 남긴 나를 보고 쾌차를 빌어주는 동지애를 발휘한 식당 종업원이 있다.

p.36 - p.37


거칠게 말하자면 '그'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하는 셈이다. 만약 둘 중 무엇이 스스로와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지배하는 쪽보다는 '세상' 쪽에 가깝다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해도 답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없다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세상은 지배하는 사람이 있건 없건 전혀 문제없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니, 거기에 더하여 훨씬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과 접촉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불안해진다. 친구와의 간단한 저녁식사 약속마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괴로움을 불러일으킨다. 장례식에 가고, 사무실 동료와 함께 일을 처리하고, 기차역에 누군가를 마중나가는 등의 사회적 의무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하루종일 안절부절 못한다. 정작 닥치면 별일 아니고 그리 걱정할 만한 일도 아닌데 전날 밤부터 근심스러워 잠을 설치기도 한다 .이런 일은 다음에도 또 반복되고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나아지는 법이 없다.

"나의 습관은 고독으로 인해 생긴 것이지 사람들로 인해 생긴 게 아니다"라고 말한 이가 루소였는지 세낭쿠르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이 말은, 나 같은 인종까지는 아닐지라도 나 같은 부류의 인간의 영혼을 잘 보여준다"

p.67 - p.68


정말로 현명한 사람은 높이 오를 수 있는 잠재력을 근육에 담고 있지만, 의식으로는 산을 오르기를 거부하는 자다. 그는 자신의 시선 덕분에 모든 산을 소유하고, 자신의 위치 덕분에 모든 계곡을 가진 자다. 정상을 황금색으로 물들이는 태양은 정상에서 아주 밝은 빛을 견뎌야 하는 이보다 골짜기에 있는 이에게 더욱 금빛으로 빛난다.

p.103


위험이 있는 곳에는 결코 가지 않는다. 위험이 지루해질까봐 두렵다.

p.105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는 나와도 닮은 구석이 있다. 일반적인 대중에게 건넸을 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라고 답할만한 의견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꾸준히 옳은 것이라 생각할만한 나름의 이유를 꾸준히 찾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물리적으로 자신을 지켜내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성실함이 요구되는 일인지.


나는 바르게 말할 것이다. 무미건조함과 규칙과 일상을 넘어서는 언어를 사용해, 사진을 찍듯 절대적으로 말할 것이다. 나는 말하지 않고 표현할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문법에 복종하라. 자신의 표현을 좌우할 수 있는 자는 문법을 이용하라. 로마의 황제 지기스문트는 연설할 때 저지른 문법 실수를 지적한 이에게 "나는 로마의 황제요, 문법 위에 있도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역사 속에 "문법을 초월한 자", 지기스문트로 남았다. 위대한 상징이 아닌가! 자신이 말할 내용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는 자는 자기 방식으로 로마의 황제라 할 수 있다. 그 칭호는 장엄하고, 그 정신은 위대하다.

p.117 - p.118


이성의 여인숙

믿음과 비판을 연결하는 길 중간에 이성이라는 여인숙이 있다. 이성이란 어떤 대상을 믿음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는 개념이지만 그래도 역시 믿음이다. 왜냐하면 이해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p.231


한 시대의 문화에 속할만한 모든 것들 - 종교, 정치, 관습, 규칙 등 - 은 그에게는 큰 제약이 되지 못한다. 자신의 몸은 규칙적이고 꾸준한 생활에 할애하고, 정신만큼은 자유롭게 누구보다 먼 곳으로 다녀오는 것에 그 어떤 망설임도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술은 행동이나 삶을 대체한다. 인생이 감정의 의지적 표현이라면 예술은 감정의 지성적 표현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이나 감히 바랄 수 없는 것, 또는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을 꿈속에서는 소유할 수 있는데 이 꿈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감정이 너무 격해서 행동으로 옮겼는데도 만족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삶 속에서 미처 행동으로 다 표현되지 못하고 남은 감정은 예술 작품으로 형상화된다. 즉 예술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표현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갖고 남은 것을 표현한다.

p.295


예술은 사회적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 위대한 예술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말을 걸고, 다른 하나는 우리 영혼의 깨어 있는 곳에 말을 건다. 첫번째가 시이고, 두번째가 소설이다. 시는 구조를 통해 거짓말을 하고, 소설은 거짓말을 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시는 다양한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글, 다시 말해서 말의 본질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글을 통해 우리에게 진실을 전하려고 한다. 소설은 우리 모두가 거짓임을 알고 있는 현실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고자 한다.

p.336


사랑과 잠, 마약과 술은 예술의 기본 형태와 다름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과 같은 효과를 낸다. (...) 그러나 예술에는 환멸이 따르지 않는데, 예술은 처음부터 환상을 인정하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로부터 깨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술 안에서 우리는 자는 게 아니라 꿈구기 때문이다.(...) 소유하는 것은 상실하는 것이다. 소유하지 않고 느끼면 진정 그것을 간직하게 되는데, 대상으로부터 핵심만을 취하기 때문이다.

p.348


이 책은 어쩌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것에 대해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 중 뚜렷이 눈에 띄는 것은 '예술'에 대한 짧은 견해들이다. 그가 꾸준히 언급하는 '꿈'처럼, 예술도 현실과 무관하기에(쓸모없기에) 가치 있다고 기술되어있지만 사실 그것이 삶을 지탱하는 데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사무실 사환 아이가 떠났다.

p.358


이 사환 아이가 특별한 이유 역시 '모르는 장소들'을 꿈꾸면서, 현재의 장소에서 이 모든 곳을 여행하다시피 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생생한 꿈 속의 여행. 그런 여행은 예술적이다.


...내가 보기에는 직선이고 내 머릿속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직선이었는데 실제로는 두 지점 사이를 잇는 가장 먼 길이었던 경우가 빈번했다. 나는 한번도 활동적인 삶을 영위하는 능력을 지녀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실수하지 않는 동작에서 나는 매번 실수했고, 다른 이들은 자연스럽게 할 줄 아는 일을 하기 위해 나는 늘 노력해야 했다. 다른 이들은 원치 않는데도 얻는 것들을 얻기 위해 나는 간절히 소망했다. 인생과 나 사이에는 항상 반투명 유리가 있었다. 그 유리는 보거나 만져봐도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나는 그 인생 또는 계획을 살지 못했다. 

p.493


신은 나를 어린아이로 창조했고,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남겨두었다. 그런데 신은 왜, 인생이 나를 두들겨 패고, 내게서 장난감을 빼앗고, 오락 시간에 나만 홀로 내버려두고, 한참 동안 흘린 눈물로 더러워진 푸른색 턱받이를 그토록 연약한 손으로 구기는 것을 허락했는가?

p.502


일본식 찻잔 세트의 잔 하나가 깨졌을 대, 나는 그 원인이 하녀의 부주의한 손길이 아니라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 속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고뇌라고 상상했다. 그들의 은밀한 자살 결단은 내게 그다지 놀랍지 않다. 우리가 권총을 자살에 이용하듯 그들은 하녀를 이용했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은(나처럼 정확히 안다는 것은) 현대 과학을 초월하는 것이다.

p.514 - p.515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한참을 즐거워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 자신에게서 나를 너무 많이 벗기다보니 내게 있어 존재한다는 것은 내게 옷을 입히는 것이다. 위장한 상태일 때에만 나는 내가 된다.

p.5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