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사람들과 더 좋은 글을 함께 읽고 싶다, 보석 같은 글들을 선물하고 싶다, 읽기를 통해 아낌없이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년 가을, 중앙동의 작은 책방에서 시작한 <세 계절 읽기 모임>이 어느새 2기라는 시간을 훌쩍 지나왔습니다. 쉽지 않은 소설 책을, 그것도 단편집을, 별다른 정보도 없이, 각자의 시간 속에서, 읽기가 허락되지 않는 삶의 틈바구니 속에서 애써 읽고 또 읽지 못할 때는 읽어야 한다는 걱정으로, 염려로 읽기를 지속하느라 모두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작은 여정이었지만 따로 또 같이 읽기의 시간을 완주했다는 것에 축하의 인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11주간 동시대의 한국 소설이 각자의 일상과 생활에 어떤 모습으로 내려앉았을지 그 결과 무늬가 궁금합니다. 어느 날, 어느 때, 어느 사람과 함께 소설 읽기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도 모르게, 욕심과 의도 없이 품었을 생각과 뜻이 슬며시 나타나 그 순간을 현명하게 도울 수 있으리라 예감하게 됩니다. 많은 이야기, 많은 인물들, 그들의 슬픔과 고통, 그것을 응시하려는 애씀과 용기가 여러분들의 삶 어딘가에 스며 있겠지요. 그 이야기들을 잘 간직하고 키워 스스로를 보살피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질 수 있는 선물의 시간 또한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품게 됩니다.

 

 

2.

다섯권의 소설집을 읽어가며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던 듯합니다. 윤이형의 소설은 그가 지켜내려는 세계와 마음이 애절하고 또 단단해서 무척이나 반갑고 기쁘게 읽어내려갔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아, 이게 소설이었지, 이런 즐거움과 벅참을 단박에 건네는 게 소설이었지 하는 생각을 여러번 하면서 말입니다. 누군가를 지켜내는 일의 귀함. 소설집 전반에 흐르고 있는 미래 세계와 독특한 설정임에도 저는 속절없이 누군가를 상실했던 경험과 다시 마주하는 용기와 설사 지켜내지 못하더라도 이전처럼 무기력하게 떠나보내지는 않겠다는 결기와 염원이 소설을 읽는 내내 진동하는 듯했습니다. 수록작 <러브 레플리카>의 '경'이 묘사했던 탑승객 모두가 모래가 되어 흘러내는 꿈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기내식을 먹으면 사람들이 모두 모래로 흘러내릴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걸 막지 못하고 가만히 지켜봐야 했던 고통. 그럼에도 그들을 다시 손으로 버무려 원래의 형체로 돌려주려는 소명 속에서 애도가 윤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꽤 고대하고 기다렸던 최정화의 첫번째 소설집은 모두에게 감탄과 즐거움을 선사했지요. 조금씩 무너지고 뒤틀려 있는 일상의 공포를 미니멀한 설정 속에서 간명하게, 또 정확하게, 그래서 서늘하게 짚어냈던 그 감식안에 모두가 탐복했었지요. 태작이 없고 수록된 모든 소설이 일정한 성취를 이루고 있는 꾸준함과 어떠한 과잉도 느낄 수 없었던 일관되고 정제된 완숙미에 이후에 발표될 무시무시한 소설을 한껏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일상의 불안과 공포를 오랫동안 응시해왔던 이만이 펼쳐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따라 읽으며 손쓸 수 없는 일상이 공포스럽기보단 조금 더 선명하고 정확하게 응시해보고 싶다는 작은 용기가 샘솟기도 했습니다. 소설 곳곳에 은근한 유머와 발랄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용준의 소설집에 대해선 모두가 조금 갸우뚱한 반응이었습니다만 그 갸우뚱함이 좌표가 되어 앞에 읽었던 소설들과 앞으로 읽어야 하는 소설에 작은 지침과 길잡이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조금은 성기고 안일해보이는 서사구조는 작가의 역량이나 태도의 문제라기보단 당위적인 것이라 생각해왔던 남성적 서사에 대한 의문과 물음, 또 문제 제기와 불편함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힘 있고 선명한 서사의 기저에 아버지 죽이기(벗어나기)라는 오래되고 질긴 구조가 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오래되고 질긴 문제에 천착하는 작가의 태도가 조금은 게으르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한 작가에 대한 평가라기보단 남성적 서사에 대한 불편함과 게으름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두고 싶습니다.

 

김엄지의 첫번째 소설집은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선명하게 파악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처럼 엄지 척!을 올렸던 것 같습니다. 기괘하고 괴팍하며 음란하게 뒤틀린 폭탄 같은 소설, <돼지우리>의 충격보단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맹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소설에 더 많이 이끌렸던 듯 합니다. 선명하지 않은 사람, 흐릿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뜻하지 않게 이상한 힘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다섯번의 모임 중 모임의 온도가 가장 높았던 것, 누군가의 읽기가 생각지도 못했던 감응을 불러왔던 것, 돌아가서 다시 읽고 싶은 의욕이 가장 고취되었던 회차가 아니었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은 듯 보이는 인물들의 진지하고 맹렬한 반복이 문학적 수사나 유의가 아니라 현실적 실감과 실천으로 다가오기도 했었지요.

 

그리고 어제 읽었던 오한기의 첫번째 소설집은 의사(pseudo) 정보와 이야기로 직조해낸 진지한 모큐 소설(?)처럼 읽혔지요. 한국문학의 진지함, 정색주의, 완고함, 의미에 대한 강박, 시대적 사명에 대한 강박, 숨막히는 문학적 규율를 내색도 하지 않고 멋지게 교란하며 다른 파선을, 아니 멋진 파선을 그린 주목할만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소설에 대한 평가는 그 어느 회차보다 많이 갈리긴 했지만 다섯번의 모임을 진행해오며 우리가 읽고 또 읽고 싶었던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이고 쉽게 접근하기 힘든 고민에 다른 방향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나라는 평가를 해보고 싶습니다. b급 서사도 아니고 알레고리도 아닌 내내 엉뚱하지만 분명 진지한 일관성이 소설집 전체를 관류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얼핏 지적 유희처럼 보일 수 있는 인용과 너저분한 상상력이 특정한 가치에 결박되어 있는 소설을의 족쇄를 푸는 진지하고 과감한 시도처럼 느껴지도 했습니다. 오한기의 시도에 기대어 '동시대 소설을 읽으면 걷기'라는 2기의 지향점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 싶었습니다만 꼭 오늘이 아니어도 좋지 않을까, 2기의 마지막 모임까지 진지한 성찰은 조금 지치지 않을까란 생각에 가볍게 '석기시대'로 향했던 것입니다.

 

 

3.

소설을 읽으면서 번잡하고 번다하게 번져가는 망상들을 고유한 각자의 이야기로 자연스레 펼칠 수 있는 시간을 고대하고 염원하게 됩니다. 오한기 소설을 읽으며(팽팽한 긴장감을 위해 마지막 한편은 꼭 모임 당일에!) 시간에 쫓기면서도 오늘 왜 바지락 된장찌게를 끓여먹고 나올 수밖에 없었는가를 엉뚱하고 장황하게 늘어놓고 싶었답니다. 저의 영향 때문이겠습니다만 우린 너무 진지해요. 조금 느슨하고 편안하게 이야기 하는 방법도 시도해보고 찾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다섯번의 모임동안 한결 같이 진지하게, 심각하게 읽고 듣고 이야기 나눈 것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엉뚱한 말을 진지하게 펼치며 스스로에게 몰입하고 표현하는 발화 퍼포먼스가 넘실되는 모임을 기다려봅니다. 노래하듯이 춤추듯이 읽고 말하고 나눕시다. 모두 엉뚱하고 진지하게 여름 맞이하시고 3기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