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글을 쓰는 장면을 목격한 후로, 나도 그런 분위기와 자세 속에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었다. 그러나 이 글이라는 것은 완벽한 상황이 주어진 때에 찾아 오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불쑥 찾아온 글감을 마주한 것은 높아진 심박수를 가다듬기 위해 온천천을 천천히 걷고 있던 때였다. 다른 완벽한 조건들 - 차분한 음악이 나오고 있을 것, 공간은 카페일 것, 의자는 편안한 것으로 아빠다리를 해도 되는 구조일 것, 햇살은 내 등을 비출 것, 음료는 미지근한 녹차 라떼로 하지, 등의 조건 - 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볕을 등지고만이라도 글을 써보자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부산 지하철 1호선 명륜역 고가 아래의 한 바위 위에 서서 글을 쓴다. 앉아서 쓰려고 했는데 방금 지나간 말티즈가 주변의 다양한 바위에 영역 표시를 하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옆에서 닥스훈트 한 마리는 신나게 돌다리를 건너며 주인에게 점프 솜씨를 뽐내고 있다, 그 사이에 지나가는 다른 개들은 서로의 꽁무니를 맡으며 신원 확인 중이다. 그야말로 개판이다. 이 동네에 개가 이렇게 많았을 줄이야, 사는 내내 몰랐다. 다리 아래에 살고 있는지도 몰랐던 비둘기 떼는 내가 오자마자 머리 위로 날아간다. 비둘기가 이렇게나 많은데 왜 평화는 찾아오지 않는걸까. 


아, 그러니까 쓰려고 했던 것이 있었다, 멈춰서서 쓰지 않으면 ㅡ 이런, 방금 날아갔던 비둘기 떼가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다, 다시 한 번 내 머리 위를 지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ㅡ 안 되겠다, 생각한 것은 엄마와 나의 역학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경우에 커다란 말다툼이나 갈등은 미세먼지처럼,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작은 차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 작은 차이의 지점이야말로, 쌓아두었던 불만이 활활 타기 시작하는 발화점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오늘 그 작은 차이 중 하나가 무엇인지 문득 알아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방금, 엄마가 알게 되면 기가 막혀하며 잔소리 할 일을 또 하나 저지르고 돌아오는 길이다. 구매할 당시에 값을 꽤 치렀던 겨울 외투와 니트 종류 등 다양한 옷가지들을 포장해서 얼굴도 모르는 분에게 부친 것이다. 이주 노동자들이 다가오는 겨울을 잘 대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글이 있었고, 왠지 떠오르는 옷들이 있길래 차곡차곡 꺼내두고서 적절한 타이밍을 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기부 자체에 대해서는 별 다른 반대 의견이 없는 엄마이지만, 보낸 것들을 확인하겠다고 하는 순간에는 끝이다. 왜 이 새 옷을 안 입고 보내는 거냐 ㅡ 새 옷은 몇 개 밖에 없었다 ㅡ , 니한테 옷 사 주면 안되겠다 ㅡ 대부분의 옷은 내가 월급 받아서 샀던 거다 ㅡ , 망구 필요 없다고 생각하던 게 갑자기 필요한 날이 있데이 ㅡ 3년을 옷장에 모셔뒀는데 입을 일이 없었다 ㅡ 등등의 공방이 이어질 것이 눈 앞에 선했다. 


지나치게 말쑥하게 생긴 옷은 입고 나가면 마음이 불편하다. 입고 나서 더럽혀 오면 그것대로 문제, 망가뜨려도 문제, 그런데 한정된 옷장을 가진 나에게는 안 입는 것 또한 문제다. 옷이 많다고해서, ‘오늘은 체감 경기가 불황이니 코트를 세 개는 입어야겠군’ 이라거나, 안경이 많다고해서, ‘미래가 불투명하니 안경을 네 개 정도는 써줘야겠군' 하며 실천에 옮긴다해도 그 또한 문제적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그 옷들은 나랑 안 맞는 옷이었다. 그러니 고이 모셔두어 좀벌레들의 번식처가 되기 전에 얼른 올바른 주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하는 것이 응당 맞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비장함을 품고, 양 손 가득 쇼핑백을 든 채 집을 나서는 내게는 어떤 사명감이 있었다. 


말하는 순간 거짓말임이 들통날 것이 뻔하지만 알리바이도 준비했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것은 늘 심장이 튀어나올만큼 두려운 일,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라며 한 걸음 한 걸음에 기도를 담아 집 앞에서 우체국까지 잽싸게 이동했다. 가끔 강냉이와 뻥튀기 틔우는 소리가 울릴 때만 사람들이 멈춰서는 느긋한 오후의 길 위에서, 내 마음만 엔진소리를 내며 달려나가는 꼴이 어울리지 않는다. 어쨌든 우체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11시 방향에서 건네주신 송장번호가 찍힌 영수증 귀퉁이에 설탕 커피가 묻은 것을 보며, 직원 분에게 '아직 덜 빈 잔이 책상 근처에 있었지요?', '오후의 커피를 즐기는 중이었지요?'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어쨌든 미션 클리어. 


그러고보니 나는 이런 상황을 꽤 재밌어하는 것 같다. 어쩐지 두근두근거리는 템포가 늘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 문득 뭔가를 몰래 어지르고 (내 나름으로는) 깨끗이 치워두는 상황. 그러나 언젠가는 꼭 들키고야마는 순간들. 요즘은 짬이 날 때에 옥상을 어지르곤 했다. 시아노 타입 프린팅을 한답시고 옥상 여기저기에 푸른 물방울을 흘려둔다던가, 만든 어떤 것들에 락커를 뿌려대며 도색을 하거나, 화방에서 사 온 마블링 물감으로 이상한 무늬들을 잔뜩 만들어놓고 좋아한다. 물론 내 나름 뒷정리를 하기는 하는데, 아무리 치워도 그 흔적이 남고, 그것으로 인해 엄마는 늘 나의 소행임을 알아채고 만다. 그래, 진실은 바닥에 있었다! 


엄마는 바닥에 예민한 사람, 나는 책상 위의 세계에 예민한 사람이었고, 거기에 미세먼지만큼 작은 우리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매일매일 바닥을 쓸고 닦아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엄마는 바닥에 이불을 펴고 자는 것을 좋아한다. 이불이라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이 완결되거나 정리된 상황에서만 펼 수 있는 물건이다. 반면 그 딸인 나는 바닥을 맘껏 어질러두고 놀다가 자러 기어들어가도 아무 문제 없는 침대를 좋아한다. 무엇보다 어질러 둔 그 상태 그대로 일어나자마자 또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좋다. 


그녀는 바닥을 매일매일 쓸고 닦지 않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허리 위의 세상을 정돈하지 않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의 심박수를 높이는 이러저러한 활동을 한 후에 허리 위 수준만을 정리하는 나는 그 바닥을 유심히 바라보는 엄마에게 남겨진 흔적을 들킬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렇게 그 작은 지점을 시작으로 그칠 새 없는 긴장을, 거미줄 마냥 팽팽하게도 유지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나는, 이제부터는 바닥을 유의 깊게 바라보며 정리하는 인간으로 거듭나게 될까? 그럴리가. 물도 꾸준히 흘러줘야 썩지 않듯이, 엄마와 나도 이러쿵 저러쿵하며 결국 되찾고마는 어떤 밸런스를 가끔은 무너뜨리고 가끔은 되찾아줘야 지금처럼 두근두근하게 지내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야말로 원활한 혈액순환과 활발한 신진대사를 촉진시켜드리기 위한 내 나름의 효도일지니. 음, 망구 내생각이긴 하네. 


어쨌든 등에 햇살을 지고서 글을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구나. 이 정도 쓰고 나니 몸의 여기저기가 가을 볕에 지글지글 익는 기분이 든다. 비로소 마음은 적당한 박자를 되찾아서 살아있는 것답게 뛴다. 이젠 그늘만 찾아 다니며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2015.10.24.생활-글-쓰기 모임 2기 2회


YKSQZME(익스큐즈미)

잡종.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밥.’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 밥을 여기저기 퍼나르는 방법은? 미디어.’ 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디어를 더불어 공부했다. 밥을 실어나를 마음에 쏙 드는 미디어를 찾아 헤매다보니 기획자와 교육자와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잇는 사각형 안팎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편식 및 리셋 증후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Excuse me하며 사과할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