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입 안에서 이리로 저리로 굴려보고 있는 표현이 하나 있다. 누군가가 포장을 까서 내놓았는데, 내가 그것을 삼켰다. ‘작고 재미난' 이라는 말을 오래 물고 있어야만하는 왕사탕처럼 맛보는 중이다. 단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더 줄어들지도 않는 그 단어는 어쩌면 유리구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들은 딱 고만고만한 크기였으면 좋겠다. 너무 커서 또 다른 가방에 눌러 담을 필요도 없고, 주머니 없는 옷을 입어도 주먹 쥔 한 손에 담고 다니다가 양손 모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입 안에 넣어 옮길 수도 있는 정도의 작은 재미남. 

얼마전 양 손 가득 즐거움들을 들고서 나오는 사람들을 헤치며 백화점에 들렀던 적이 있다. 상품권 하나를 선물로 받은 김에 뭐 필요한 것이나 있나 싶은 마음에 들러보았던 것이다. 도무지 익숙해지기 어려운 공간, 층별 소개를 살펴보며 대충의 지리를 가늠하고 걸음을 옮긴다. 거대한 공간 안에 빽빽하게 들어찬 ‘무이자로 할부 구매 가능한' 즐거움들이 차분히 시선을 기다리고 있다. 한 장면과 다른 장면 사이에 쉬어갈 틈이 없어서, 방금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성찰할 수 조차 없다. 몇 가지를 입고, 벗고, 걸치고, 보고, 걷다보니 금세 지친다. 들어왔던 지하로 다시 돌아와 좋아하는 빵집에 들렀고, 비로소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즐거움을 입 안에다 넣을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후 살펴보니, 지하 식품 매장부터 꼭대기에 이르는 문화센터까지 채워진 층들은 매슬로우가 제안했던 욕구피라미드가 미묘하게 재배치 된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정확하게 매치되지는 않지만 생명유지에 필요한 욕구는 식품 코너에서, 안전에 대한 욕구는 의류 코너를 통해서, 관계에 대한 욕구는 가정과 생활 코너에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명품 코너에서, 마지막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욕구는, 설마, 문화센터? 





문득 의문이 생긴다. 자아실현 이후의 '욕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백화점의 꼭대기에서 사람들이 내내 살아가는 것은 아닌 것처럼, 언젠가는 다시 바닥에 발을 딛고 또 다른 역할을 꾸리러 삶의 터전으로 혹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다시 생존에 대한 욕구를 돌이켜보게 되는 순간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람이 하나의 자아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텐데, 그렇다면 자신의 또 다른 모습들은 끊임없이 생존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을 수도 있고,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불안해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단단하게 벽돌을 쌓아올린 듯한 느낌의 콧수염 신사인 매슬로우씨의 세계와는 달리, 당장 입 안에 넣고 싶은 말랑말랑한 마쉬멜로우씨의 작고 재미난 세계에서는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산처럼 솟은 매슬로우씨의 인생 지형도와는 달리, 분지처럼 푹 꺼져있는 이 곳을 발견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을 바쳐 일궈내야 하는 역할이나 목표는 없이, 생의 에너지를 오히려 다양한 역할에 나누어 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주자들의 모습일 것이다. 신나게 어느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선 후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지만 새로운 방향을 찾아 더 넓은 동심원들을 그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자아를 실현하는 단계에 이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 초조한 상태로 충족되지 않은 욕구 역시 동시에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 근래에 내가 발견한 작고 재미난 순간들은 누군가의 친구이자, 작업자이자, 생활인으로서의 내가 가진 서로 다른 단계의 욕구들을 충족시켜주었다. 복잡다단한 감정마저 들었지만 돌이켜보자면 결국, 핫초코에 띄워 먹기 좋은 마쉬멜로우 정도의 것이었다. 보고 있으면 살살 녹아내리는 그 모양새를 나는 지그시 바라보며 비로소 느린 행복을 만끽한다. 


순간 하나. 매일 아침의 ‘의식(Ritual이라고 메모해두는 이 활동에는 참으로 잡다하고 다양한 활동이 포함된다.)’으로 행해오던 일들 중 하나인 100일간 낙서하기가 끝났다. 시작하게 된 계기는 싱거운 것이었는데, 또 다른 백수씨 하나가 자신은 글을 쓰고 내가 그림을 그리는 책자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어, 나 그림 못그리는데요, 얼마나 못그리냐면... 몇 개 그려서 보여줄게요.” 하며 그린 것이 시작이다. 몇 개 그리다보니 흥미가 생겨서 ‘그 책, 한 번 만들어 봐?’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작품을 잘 완성하는 것도 좋겠지만, 잔근육이 필요하지 싶었다. ‘잘 그리기'보다는 ‘꾸준하고 무성의한 그리기'가 필요했다. 바쁜 날에는 대충대충으로 일관했지만, 그래도, 매일 한 줄이라도 거르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우습게도 내가 경험하고 싶던 모습 중 하나인 ‘그림책을 만드는 사람'에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젠 또 어떤 모습을 가져볼까, 하며 멀리 있는 친구 하나와 또 다른 작당을 꾸리기 시작했다. 


순간 둘. 결혼하는 친구를 위해 세상에 2장 존재하는 포스터와, 4권 뿐인 책을 만들었다. 언젠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서 책으로 내고 싶다고 말하는 그 친구를 만날 때마다 마음 한 켠에서 ‘야, 너 SNS에 엄청 웃긴 글 많잖아. 그걸로 만들어 봐.’라는 목소리가 안에서 쿵쿵 울렸다. 친구의 인스타그램에서 내 맘대로 괜찮은 글들을 추리고 최대한 단순하게 작업하여 그 날 오후 완성했다. 거리가 멀어져서 자주 만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의 무게가 약간은 덜어졌다. 대량생산이 전제되는 것이 현대의 디자인이 가진 특징이자 매력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까운 이들을 위한 것은 소량생산하는 마음으로 임하고 싶다. 한 가지 일을 할 때는 한 가지만 생각하면서, 한 사람을 위한 디자인임을 잊지 않으며. 


순간 셋. 얼마전까지 재정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맡았던 일이 마무리되었고, 그 와중에 견적을 내고 최종 사양을 조율하며 메일을 많이 주고 받은 인쇄업체 관계자분이 계셨다. 거의 매일 같이 메일을 주고 받으며 어리버리하던 나는 그의 메일을 통해 다양한 가공, 인쇄 공정에서 주의해야 할 점 등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디자인 파일을 넘길 무렵, 이후부터는 그 분이 아닌 다른 담당자가 인쇄 시작부터 종료까지를 맡을 것이라는 안내 메일을 받았다. 다른 담당자는 자신보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니 절대 걱정 말라는 요지의 메일 끝에는, (조금 까다로운 방식이라 나를 내내 불안하게 했던) 표지 작업을 실제로 출력해서 접어 보여주신 첨부파일이 있었다. 아이디어 스케치를 했던 것과 꼭 같은 모양으로 나온 결과물을 보며 얼마나 기뻤던지. 더 이상 이런 메일 주고 받음은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시원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다 며칠 전, 다른 건으로 그 회사에 전화를 할 일이 있었는데 수화기 끝에서 반가워하는 반응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제가 그 ○○○대리입니다!”. 우리는 펜팔을 하다가 처음 전화한 사람들 마냥 엄청 낄낄거리며 신기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 작업 기간 내내 말을 할 수 없어서 늘 글자로만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전화를 끊고서, 아무리 먹고 살기 위한 평면적인 ‘업’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일을 만들고 서로 다른 일을 이어가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생각을 놓치지 않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시멜로우씨는 매슬로우씨보다는 덜 유명한 상태로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꾸린 분지 지형을 발견한 사람들은 매섭게 날을 세운 창을 앞세워 달려드는 산지의 사람들을 맞서며 부딪히기보다 꼬옥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마시멜로우를 띄운 핫초코 한 잔을 건네주면서 말이다.


YKSQZME(익스큐즈미)

잡종.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밥.’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 밥을 여기저기 퍼나르는 방법은? 미디어.’ 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디어를 더불어 공부했다. 밥을 실어나를만한, 마음에 쏙 드는 미디어를 찾아 헤매다보니 기획자와 교육자와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잇는 사각형 안팎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편식 및 리셋 증후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Excuse me하며 사과할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