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결정은 다음 날 후회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침의 결정은 꽤나 만족스러운 경우가 많다. 토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탈 수 있는 가장 빠른 열차를 예매했고, 하나 남아 있던 객실을 잡았다. 대충 필요한 것만 배낭에 집어 넣고, “나 서울 갔다 온다. 자고 온다. 내일 봐.”하고 튀어나왔다. 결혼식 하객으로 참여해야한다는 것이 핑계. 이미 못가겠다며 친구한테 축의금도 대신 내 달라고 송금한 상태였지만, 아침에 그냥 마음을 바꿨다. 나오자마자 ‘아, 정장 안 넣었네, 그냥 입은 거 그대로 입고 가자’, ‘결혼식에 운동화는 좀 아닌가? 에이, 내가 구두 안 신는 거 다 아는데 뭐’, ‘잠옷 깜빡했다. 어차피 혼자 잘 건데 뭐.’하며 허둥지둥댔다. 다행히 열차를 놓치지 않았고, 숙소에서는 잠옷 겸 가운이 제공된다고 한다. 낯선 곳에 가서 잠까지 자고 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편안한 자리에서 어긋나게 몸을 살짝 틀어보았다가 ‘어라 불편하네'하며 제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내 몸의 감각들은 평소보다 예민한 상태를 유지해 줄 것이다. 당일 여정으로 가도 좋을 일정을 굳이 늘려버린 것도 그 예민한 상태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요즘 들어 부쩍, 나를 지키기 위해 모아둔 것들이 하나 둘 내 주변을 둘러싸더니, 어느샌가 그것을 지키는 데에 나의 하루가 다 간다는 것을 느꼈다. ‘익숙함'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지나치게 커졌구나 싶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는 사이들이 생기고, 되묻지 않아도 눈치를 채는 것들도 생긴다. 하지만 그 익숙함 만큼, 낯선 이는 나의 언어 혹은 방식에 쉽게 접근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안에 들어있는 나는 한 없이 말랑거리고 편안한 상태이지만, 나를 둘러싼 벽은 외부의 누군가가 들여다 볼 엄두를 낼 수도 없을만큼 공고해지고 있을 것이다. 더 단단해지기 전에, 작은 구멍이나 좀 뚫어놓자, 하는 마음이 토요일 오전의 나를 일으켜세웠다. 


사실, 구멍의 필요성은 시한이 촉박한 새로운 작업 덕에 더욱 절실하기도 했다. 이번 작업은 작은 지도를 만드는 일. 이런 종류의 일은 처음이지만, 불특정 다수를 위한 정보 정리 작업은 늘 해 보고 싶던 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해보자' 마음 먹은 후부터 부담감이 느껴졌다. 어릴 때 동네 보물 지도를 그려보긴 했지만, 이번엔 나 혼자 보고 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그려져 있는 길과 장소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별 것 아닌 일일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미 들어가야 할 내용은 대략 준비되어 있고 대충 모양만 나오게 만들기만 해도 되는 일이긴 하다, 청소 안 한 방을 담요 한 장 아래에 덮어 숨기듯이. 그러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그 마음을 들추는 질문을 하다보니 결국 담요를 치워야 할 것만 같았다. 시간도 없고 내 실력은 더 없다만, 그렇다고해도 정보를 정돈할 때 선행되어야 하는 태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건 나도 갖출 수 있는 것 같다. 기반을 일단 잘 잡아두면 예쁘기만 한 부실공사보단 나을거다, 그렇담 이제부터 무엇을 하면 좋을까? 질문이 모양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한다. 


정보를 정리해야하는 순간마다 떠올리곤 하는, 오래된 기억 속의 시간을 되감기 한다. 아홉살인가 열살 무렵에 숙제로 일기를 써 갔더니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네 일기에는 이, 그, 저 같은 표현들이 많은데, 도무지 문장 안에서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구나'며, 글을 그렇게 쓰지 말라고 혼이 난 적이 있다. 일기잖아요, 신문 기사도 아닌데, 숨기고 싶은 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라고 말하지는 못했고 다음부터는 일기장 사이에 지우개 가루를 왕창 넣어서 제출했다. 그 선생님은 언제나 반쯤 누운 자세로 일기장 검사를 했으니까, 때 이른 지우개 가루의 눈도 보셨을 것이다. 어쨌든 혼을 낸 데에 대해서는 화를 표했지만 조언은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 후로는 글 속의 ‘이, 그, 저'를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게 다듬으려고 더 많은 신경을 썼으니까. 지도도 마찬가지겠지, ‘이 정도는 누구나 다 알아'라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게 첫번째 단계일 것이다. 


사실 어떤 균형에 도달한 이후의 안락함을 일부러 버릴 필요는 없지 싶다. 하지만, 상황이건 장소건 그 한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전체를 관찰하고 그에 대해 기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일반적으로 이르기는 어려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스스로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불편한 위치에 놓은 다음에 편안한 상태로 되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겉모양은 같지만 속은 이방인인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낯섦'이 생의 기본값이라고 생각한 이후부터는, 이렇게 이방인이 되는 속도와 정도로 결정되는 특징을 내 맘대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회복탄력성이 낮아져 갈 때, 그러니까, 사는 게 다 뻔하지,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라는 생각이 이어질 때 내가 주로 찾았던 것은 낯선 냄새였다. 계절의 초입에서 느껴지는 냄새, 이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드는 이국적인 음식의 냄새, 당장 도망쳐나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해 능동적인 인간이 되도록 만드는 불쾌한 냄새도 있고 기억의 북마크가 되어주는 냄새들도 있다. 낯선 곳을 찾아가는 이유도, 몸에 달린 코를 여기서 저기로 옮겨 낯선 냄새를 맡게 해주겠다는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한 동안 만나지 못했던 한 동생과 저녁 약속을 잡았다. 가쁘게 도착하는 친구의 문자들, ‘태국음식은?’ ‘인도음식은?’ ‘향신료 팍팍, 싫나요 오늘은?’을 읽으며 ‘당신도 떠나고 싶은가보오'하고 생각했다. 아니나다를까 만나자마자 이어지는 떠나고 싶은 장소의 이름들, 서로의 정신만이라도 멀리멀리 떠나갈 수 있도록 강한 향신료가 필요한 밤이다. 요란한 토요일 저녁의 이태원 중심가를 조금 비켜서, 우리는 이슬람 사원 근처의 한 인도음식점으로 향했다. 낯선 소리를 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식당 안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엄청나게 느릿한 식사, 짜이로 입가심을 하고 카운터에 놓여있는 휀넬씨와 박하의 향까지 입 안에 잔뜩 배게 한 후 걸어나왔다. 내게 인도나 태국의 음식점에서 만나는 향신료는 떠남의 냄새다. 호기심의 냄새이고, 안도의 냄새이기도 하다. 세계 어느 곳이건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웹으로 연결된 세계는 정보의 세계일 뿐 냄새의 세계가 아니니까. 세상에 이런 냄새가 있다니, 아직 더 살아도 재밌겠어,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향이 날아가버릴새라 가게를 나오자마자 한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음식점으로 가는 오르막길에서 점찍어 둔 가게로, 이를테면 작은 국제시장 같다.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할지도 모를 온갖 식료품들을 구경한다. 사람의 냄새를 인지할 일이 평소에 잘 없지만, 매장 가득, 사람의 냄새가 난다. 낯선 냄새들, 입과 목의 다양한 부분을 써서 내는 새로운 소리들에 귀를 기울인다. 동행은 기념품으로 뭐든 하나 골라보라고 했다. 매장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족히 세 번은 탐험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차이티를 만들 때에 넣는 마살라(Masala)였다. 후추와 정향과 카다멈 등등을 가공해서 만든 가루라고 한다. 마법의 램프를 얻은 사람처럼 박스를 고이 모시고서, 집에 오자마자 마살라 냄새만 킁킁 맡고 앉아있었다. 


나는 오늘도 집 안 가득 낯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우유를 끓인다. 일이 마무리 되기 전까지는 핑계 삼아 하루 한 번은 차를 마셔야겠다. 방구석에 앉아 우리 동네 지도를 그릴 뿐이지만, 나는 내 머리속에 더 넓은 냄새의 지도를 가지고 싶다. 내가 가진 콧구멍은 두 개 뿐인데, 아직 맡아보지도 못한 냄새는 얼마나 또 많을까. 온 힘을 다해 벌름거리며 코로 탐험해나가야 할 세상은, 아직도 넓기만 하다.


붙임] 그 토요일, 광화문 광장과 파리에서도 수 많은 낯선 냄새들이 사람들의 코로 들어갔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냄새가 영영 잊히지 않는 기억의 냄새가 될지도 모른다. 숙소로 돌아와 켠 텔레비전에서 끝없이 방송되던 장면들과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던 영상의 끝에서, 이기적이게도 나는 그 냄새를 전할 수 없는 웹이 반쯤 고마웠음을 고백한다.


YKSQZME(익스큐즈미)

잡종.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밥.’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 밥을 여기저기 퍼나르는 방법은? 미디어.’ 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디어를 더불어 공부했다. 밥을 실어나를만한, 마음에 쏙 드는 미디어를 찾아 헤매다보니 기획자와 교육자와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잇는 사각형 안팎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편식 및 리셋 증후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Excuse me하며 사과할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