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한데요, 펜 중에 로트링사의 펜들은 어디에 있나요?” 

필기구들이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꽂힌 진열대 앞, 나는 당연히 있으리라 믿었던 펜을 찾지 못하고서 십여분째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일상적으로 이 곳을 찾는 이들에 연말 선물과 카드를 둘러보고 있는 이들이 더해져서 손님이 유난히 많았다. 가게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한 꼼꼼히 분류하고 정돈해 두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많은 이들은 문구점의 직원들의 도움이 없으면 자신이 찾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나도 그 무리 중 하나였다. 마침 한 종업원이 다른 이의 질문에서 풀려나는 것을 보았고, 내가 찾는 물건의 이름과 함께 질문을 던졌다. 어쨌든 브랜드 단위로 진열을 하니까, 저 질문이면 충분하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네? 로트링? 어떤 펜이지요?” 
“제도용으로 나온 펜이고 잉크를 리필로 넣는 방식인데, 두께가 0.3mm인 것을 찾고 있거든요.” 
“그런 종류라면 입구 쪽 오른편에 있는 코너에 한 번 가보시겠어요?” 

알려준 새로운 코너에 도착했지만 그 곳에도 내가 찾는 것은 없었다. 처음부터 그 곳에는 내가 찾는 펜이 없었던 것이지만 그 누구도 내가 찾는 것이 ‘없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 듯한 얼굴로, 그것은 여기에, 아니면 저기에 있을 거라고 안내해주었다. 어쩔 수 없이 결국은 ‘이런 것'이라며 이미지를 보여주자, 그제서야 이 제품은 없는 것 같다는 답을 들었다. 이름을 알고 있어도 설명이 필요하고, 설명으로 모자라 사진이 필요했다. 이 쯤 되면 '이름'이라는 것의 밀도는 직물로 치자면 모시나 삼베 같다. 

언어를 사용하다보면 이름들이 얼마나 거친가를 느끼게 될 때가 많다. 특히 일반적인 대화에서 사용되는 명사들은 어떤 섬세함들을 뭉뚱그려버리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듯 하다. 대표적인 것이 ‘사람'이라는 단어다. 자음 3개, 모음 2개로 구성된 두 글자인데다 발음하는 데에 1초도 안 걸리는 단어이지만 지구를 덮을만큼 넓은 포용력을 지니고 있으니 그 조직이 성기고 질길 밖에. 하지만 놀랍게도 그 단어에 속하는 이들은 한 없이 개별적이고 유별나며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는 공통점조차 찾기 어려운 경우도 많아서, ‘사람'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을 비단 보자기처럼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의 빈 틈마다 사람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그물의 모양을 떠올리게 된다. 

사전에서는 사람을 ‘생각'도 하고 ‘언어'도 쓰고, ‘도구'를 만들어쓰기도 하며 ‘사회'를 이루어사는 동물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렇게 따지자면 흔히 사람이라 부르지 않는 동물들 중에도 사람에 속할만한 개체가 있을 법도 하고, 지금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 중에도 조건 미달로 볼 수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꼽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런 단어는, 그저 편의를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어디 사람 뿐이겠는가, 다른 동물과 식물의 종들은 물론 의식주와 관련된 이름, 시간과 날짜들, 특정 직업군이나 학문의 계열 혹은 개개인의 역할을 분류해 둔 이름 역시 일단의 편리를 위해 붙여둔 경우도 많다. 

어쨌든 나 역시 사람이다. 나름으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소리내어 말도 하고, 필요한 것들을 직접 만들어서 쓰는 경우도 없지 않다. 게다가 태생적으로 부여된 국적이 있으니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순간조차 사회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사람’이라는 그림자 같은 이름은 홀로 존재할 때에는 큰 불편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누군가에게 ‘사람'으로 인지되는 순간부터 ‘(일반적으로) 사람은 ‘무엇'을 좋아한다 / 싫어한다'라는 명제들이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내게 적용되는데, (그것은 차츰 관계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쳐 내게 맞는 문장으로 다듬어지기는 할테지만) 그 문장들이 처음 내게 적용될 때는 몸에 닿는 느낌이 거칠다. 

고작 손목에서 가운데 손가락 정도의 길이에 지나지 않는 펜 하나도 제법 구체적으로 자신을 설명할 단어를 가지고 있고, 심지어 설명서까지도 한 부씩 달고서 세상에 나타나는데, 나는 여지껏 나를 정확히 표현할 단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매일 이 삶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라고는 어떤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하는지 못하는지 정도만을 가려낸 후 메모해 두는 것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또 그것이 매번 완벽하게 나를 기술하는 문장인가, 하면 그 표현 또한 늘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모시 정도의 휑함은 피했다만 끽해야 10수 짜리 면처럼 굵직굵직하게 짜여있는 정도다, 피부에 가까이 하기에는 여전히 까끌거릴 수 밖에. 

해설이나 해답 같은 것은 없는 과정, 만약 있다하더라도 들춰보고 싶지 않다. 정직하게, 이번만큼은 마주해보고 싶다. 우선은 기록의 밀도를 높이고, 지금은 거칠게만 느껴지는 이 단어들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해보기로 한다. 지난 주말에는 블로그를 대여섯개 만들었다. 사진을 찍고 있는 나, 디자인인지 뭔지를 하고 있는 나, 나를 반응하게 했던 텍스트를 모으는 나, 낯선 언어를 공부하는 나, 낙서를 하는 나, 그리고 아직 분류되지 않은 작업을 하고 있는 나의 기록을 나누어 모으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직관'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를 내밀며 내키는대로 이런 저런 선을 그어댔다면 이제는 그 선이 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는지를 수집된 근거와 비교해보는 것이다. 어떠한 결과를 도출하기 전에 충분한 표본이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지금까지의 생각들이 믿어봄직한 가설인지, 꿈에 불과한 헛소리였는지를 조금 더 명확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뭉뚱그려진 이 세상의 이름들은 숫자로 치자면 ‘평균'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통계에서는 대표값이라는 것을 수 많은 자료들을 요약하는 자료로 제시하는데, 그 중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이 평균이다. 하지만 평균은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 가상의 값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물론 이것조차 없다면 야기되었을 혼란을 경험하지 않게 해 준 데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 세상에는 평균의 꽃도, 평균의 겨울도, 평균의 삶도 없다. 모두는 저마다의 특별함으로, 그 어떤 단어 하나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매일을 산다. 누구와도 같을 수 없는 지문을 스마트폰 액정은 물론 사랑하는 이의 손과 얼굴과 마음에 남기며 순간의 진실을 보증하는 지장을 찍고, 높이와 크기가 다른 시선으로 내다 본 현실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대답을 써내려간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말은 세상에 없는 단어들을 간혹 포함하고 있을지는 모르나, 그 단어들이 더해질 때에야 비로소 성기던 언어들이 부드러워지고 빈틈을 메우며 세상의 추위에도 무턱대고 떨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찾아 헤매던 0.3mm 펜은 다른 가게에서 발견했다. 감당할 수 있는 촘촘함이 내 삶에 들어올 수 있기를. 다듬으며 발견하게 될 나에 대한 사실들은 60수, 아니 100수 면 정도의 밀도가 되면 좋겠다. 그 정도면 속옷을 만들어도 불편함이 없을 테니까. 내 몸 가까이에, 진정 나를 지킬 수 있는 것들을 든든히 갖춰입고서, 0도 혹은 그 아래를 향해 내달리며 찬바람만 뿜어대는 12월의 온도를 맞이해보고 싶다...만, 한 번에 100수는 좀 힘들겠지? 그럼 서른살이 되는 기념으로 일단은 30수로.


YKSQZME(익스큐즈미)

잡종.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밥.’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 밥을 여기저기 퍼나르는 방법은? 미디어.’ 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디어를 더불어 공부했다. 밥을 실어나를만한, 마음에 쏙 드는 미디어를 찾아 헤매다보니 기획자와 교육자와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잇는 사각형 안팎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편식 및 리셋 증후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Excuse me하며 사과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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