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의 가을, 한 행사를 꾸리는 자리에 함께했다. 행사의 이름은 ‘삶의 재구성', 2013년에 진행되었던 시즌 1은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는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었다면, 2014년에 진행된 시즌 2는 ‘그렇다면 어떻게?’에 답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번도 합을 맞춰본 적이 없는 서로 다른 청년 그룹들이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 모여 가을이 무르익을 즈음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거의 한 주에 달하는 컨퍼런스 기간이 끝나고 동대문옥상낙원에서 마련되었던 작은 파티 자리는 점점 파해가고 있었다. 이리저리로 자리를 옮기며 가볍게 교류하던 사람들은 둥글게 모여 앉아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고, 어쩌면 이 자리가 끝이 아닌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각자가 품은 질문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삶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 답을 가진 사람은 없었고, 각자가 해 보는 수 밖에는 없다, 는 생각과 함께 헤어졌다. 그로부터 고작 1년 남짓의 시간이 지났다.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것들도 제법 있지만, 한 해를 어떤 실험으로 채워내는 것은 안하는 것보다야 백번 나은 시간이 된 것임에 분명하다. 


만약 재구성을 해낸다면, 가장 중심에 무엇을 두고 싶은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은 너무나 명확했다 - ‘자유'. 누구에게도 속하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나에게 속하지 않았으면 했다. 직접 입으로 말하고 함께 어울리는 역할은 이제 그만두고, 작업 혹은 일로 말하고 싶었다. 그런 자유를 얻기 위해서 무엇부터 해야하는 것인지 고민했다. 2014년 뼈저리게 느꼈던 ‘내가 만든 것들을 내 것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배움을 잊지 않고서, 고향에 오자마자 사업자신고를 했다. 내 자식 같은 것들을 진짜 내 자식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업종을 뭘로 할지 한참 고민하다 ‘시각디자인'이라고 써서 제출했다. 그것이 실험의 시작이었지 싶다. 등록을 담당하시던 공무원 분께서 자신의 자녀도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꿈이라고 고집을 피운다며, ‘나’는 어떻게 먹고 사냐고 물어보는 전화도 받았다. 어쨌든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치는 못했을지언정 죽지는 않았고, 밤을 새야하는 일정이라도 낮에 나가놀고 싶은 날에는 놀았다. 아무리 바빠도 내 나름의 아침 의식을 수행하는 데에 지장 없는 한 해를 보냈고, 몸이 충분히 따스해진 후 일어났다. 

2015년이 시작할 무렵 정해두었던 키워드는 ‘줄탁동시'였다. 홀로 고군분투 하다 지쳐서 이전의 편안한 상태로 회귀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함께 떠올린 단어였다. 수요가 없는 공급의 공허하고 느슨한 상태보다는 약간이나마 팽팽한 균형점 근처에라도 이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결과물로 손에 들려 있는 작업물들을 보고 있으면 처음으로 각각의 일들을 의뢰 받았던 순간들이 하나하나 기억난다. 한 해 간 나를 먹이고, 살리고, 입혀준 작업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몸이 정상상태로 돌아왔을 때에나 비로소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빚을, 다른 방식의 노동을 뒤섞지 않고 0으로 만든 순간의 뿌듯함도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나는 낯선 자리에서 나를 소개할 수 있는 단어 하나를 얻었는데, 이를 위해 끝없이 배워야했고, 연습해야했고,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거저 얻는 ‘단어'는 싫었다. 거저 얻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들은 최대한 떼어내고, 내가 원하는 ‘단어'들을 제 값을 치르고, 아니, 웃돈을 치르더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 작업들이 쌓이기 전까지는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설명하기가 너무나 힘들었지만, 이제는 조금 편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 해가 절반 이상 지나가는 동안 미진하던 부분들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2015년이 마무리 될 무렵, 부전전자종합시장에 들어섰던 날의 기쁨은 특히 강렬했다. 부산에 온 이후로는 부품 하나를 사면 배보다 배꼽이 큰 배송료 때문에 해보고 싶던 작업을 대부분 미루고만 있었는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들어선 그 골목에는 기대 이상의 상가들이 모여있었다. 부전도서관에 들를 때 근처를 산책하며 가게들을 본 적이 있지만 모두 문을 닫은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하나하나 자세히 다가가서 바라보니 영업중이었다. 그 공간에 들어섰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숫놈숫놈? 암놈숫놈? 암놈암놈?”하는 기묘한 질문을 떠올리면 웃음도 난다. 매 주 토요일마다 모여 각자의 방식으로 의수를 만들던 오픈소스 하드웨어 커뮤니티에서의 경험 역시, 짧고 얕은 재미와 호흡에 둘러싸여 있던 내가, 삶을 재구성해보겠다는 결심을 했을 무렵 지향하고 있던 목표를 잊지 않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너무나 빽빽하게 들어찬 한 해, 어떤 한 순간만을 들어올리면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 같은 마음에 조심스러워진다. 나는 그 쌓여 있는 대략적인 윤곽만을 살피며, 내년의 키워드를 정하는 것으로 올 한 해의 순간들에 고마움을 표하기로 한다. 그리고 작년 말에 스쳐지났던 이의 말에서 나는 올해의 키워드를 찾았다. Eigen Arbeit, 이 표현에 대한 그의 설명을 한 해 내내 떨쳐낼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Eigen Arbeit 관점에서 의자를 만든다고 하면 당신은 의자를 꿈꿀 것입니다. 그 의자가 앉는 용도가 아닐수도 있어요. 하지만 당신의 의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것을 만드세요. 이것은 꿈꾸는 것에 대한 역동적인 가능성입니다. 꿈꾸고, 그리고 만드세요. 많은 지식이나 정답, 방법을 구하려 하지 말고 당신이 정하세요. 무엇이 정답이고 무엇이 틀리고,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지. 실용적인지, 쓸모있는지 모두 당신의 결정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간 말고 당신의 시간을 만드세요.” 

그토록 도망가고 싶었던 고향을 떠났다가 9년만에 돌아와서 보낸 1년이다. 1년이 지난 지금,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들과 멋진 장소들도 많이 발견했다. 놀라운 우연들이 이어졌고, 상상 이상의 평온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고 말하는 마음에다 억지로 고삐를 달아 방향을 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의 영토를 찾겠다고 다짐하며 새로운 준비를 시작하는 나에게 동생은 “객사하면 누나 혼이 구천을 떠돈다니까.”라고 잔소리를 시작한다. “정말? 그럼 항공료도 안 내고 여행할 수 있는 거냐? 귀신은 밥도 안 먹어도 되잖아? 꽤 괜찮은 장사 같은데?”라고 답해주었다. 새로운 실험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마음 속을 울린다, 시간이 없다.


YKSQZME(익스큐즈미)

잡종.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밥.’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 밥을 여기저기 퍼나르는 방법은? 미디어.’ 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디어를 더불어 공부했다. 밥을 실어나를만한, 마음에 쏙 드는 미디어를 찾아 헤매다보니 기획자와 교육자와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잇는 사각형 안팎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편식 및 리셋 증후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Excuse me하며 사과할 일이 많다.


'생활-글-쓰기 > Y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얼굴 없는 이야기들 / YKS  (1) 2016.01.03
2015년의 리스트 / YKS  (0) 2015.12.22
안부가 부른 사고 / YKS  (0) 2015.12.17
뭉뚱그릴 수 없는 촘촘함을 향해 / YKS  (0) 2015.11.29
코의 지도 / YKS  (0) 2015.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