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 리스트 / 2015.12.30
매 해 더 적은 물건으로 생활해보려고 애쓰는데, 쉽지가 않다. 맘에 꼭 맞는 물건을 찾을 때까지는 탐색을 멈추지 않는다는 이상한 부지런함을 떨다보니 올해도 몇 가지 물건이 들어왔다.

- 올해의 소중한 물건 : 버티컬 마우스
손목터널증후군이라는 질환은 손목의 특정한 부분의 근육만을 사용하다보면, 그 부분만 발달한 근육이 주변의 신경을 누르면서 통증을 유발하는 증상으로, 마우스, 키보드 등을 장시간 사용할 경우 생기기 쉽다. 손목이 계속 아프다고해도, 병원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물리치료 정도이고, 육안으로 보기에도 심하게 부어오른 환자의 경우에나 수술을 권하는 것이 전부다. 몇 년 간 손목의 통증으로 병원 신세를 지다가, 그래도 컴퓨터 앞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다른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던 친구가 마침 추천해 준 것은 버티컬 마우스였다. 선택폭이 꽤 넓었는데 그나마 가장 리뷰가 괜찮은 마우스를 올해 초에 들였다. 사용법이 많이 낯설기는 했지만, 적응 후에는 손목 통증 때문에 작업을 멈추는 경우는 없고, 손목보호대도 이젠 안 쓴다.(물론 엄청 오래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온 몸에 몸살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올해의 소중한 물건 중 하나.

- 올해의 중요한 물건 : 자전거 헬멧
새롭게 자전거를 들인 후에 첨부된 가이드를 예의상 훑어보던 중 '헬멧 착용'이 기본이라는 내용을 읽게 되었다. 안전에 대해서는 철저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아빠에게서 초보 주제에 헬멧 없이 자전거를 타려고 했냐는 훈계를 한참 들어야했다. 고민 끝에 헬멧을 하나 골랐다. 대부분이 날렵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런(?) 라이더는 아니니까, 최대한 레고헬멧 같은 것을 골라서 추려내었다. 모자도 쓰고, 장갑도 끼고, 넘어져도 문제 없도록 긴 옷을 팔다리에 몇 겹이나 입는 등 자전거를 타기 직전까지도 두려움을 몰아내는 작업이 이어졌다. 시간은 꽤 지난 일이지만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계곡 언저리의 좁은 길을 지나다가, 마주오는 자동차를 피하던 중 계곡 쪽으로 굴러떨어진 적이 있다. 다행히 돌덩이들 위에 뻗은 나무들이 무게를 잠시나마 지탱해주어 찰과상 정도로 끝났지만,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자전거를 타는 일에 대한 공포감이 컸다. 요즘은 자전거를 타러 갈 때 꼭 이 헬멧을 쓰고 나간다. 아무리 잘 아는 동네이고, 자전거도로 위를 달리는 것이라지만 방심은 금물이니까.

- 올해의 슬픈 물건 : 다초점렌즈
시력이 점점 나빠져가는 것을 느끼곤 해서, 안경의 도수를 좀 더 정확히 할겸 안경점에 갔었다. 요즘은 안경점도 안과 못지 않게 온갖 장비들이 가득채워져 있어서 병원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주로 일하는 패턴과 시력 등을 하나하나 체크하더니, 이제는 그냥 렌즈로는 눈이 힘들어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했다. 마케팅임에 분명한데도, 나는 가까운 곳을 볼 때는 초점을 가깝게 잡아주고, 먼 곳을 볼 때는 초점을 멀리 잡아준다는 기묘한 렌즈를 주문해서 넣었고, 궁시렁거리던 시간은 잊고 잘 쓰고 다니고 있다. 몇 달 뒤에 만난 은사분도 비슷한 종류의 렌즈를 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이 차이가 30살은 넘는데, 눈 나이는 비슷한가보다. 괜히 조금 슬퍼지는 순간이었다.

- 올해의 각별한 물건(?) : 마리모
작년 연말연시에는 서울에 들렀었다. 친구네 부부가 사는 집에서 한 해를 함께 마무리하고, 다 같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새해 첫 날에는 만두국을 끓여서 먹었다. 낮 시간 동안에는 친구들을 만나고 궁금하던 공간들을 둘러보았는데, 그 중 한 장소에서 저 희한한 이끼 덩어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마리모는 모스볼이라고도 불리는 작은 수중식물인데, 어떤 움직임도 없이 물 속에서 광합성만 하며 지내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 동글동글한 이끼 덩어리에 나는 반했고, 어쨌든 부산까지 무사히 데려왔다. 내 삶에 부재한 것으로 이름을 지어줘야겠어, 라며 '사랑', '건강', '인내' 따위를 후보군으로 나열하는 것을 듣던 친구는 '그러다가 또 죽어버리면 더 비참할 걸?'이라는 조언을 해주었고, 삶에 부재한 것 중에서 좀 가벼운 것으로 '노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추운 날씨의 아침에는 유난히 기분이 가라앉는데, 그런 아침에는 마리모가 잔뜩 광합성을 하고서 둥둥 물 위에 떠 있는 드문 광경을 볼 수 있다. 덕분에 우울한 기분도 날아가버릴 정도로 녹색버풀 틈틈이 작은 공기방울을 달고서 굉장히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 한 주에 한 번은 물을 깨끗하게 갈아줘야하고, 시원한 물에서만 살 수 있어서 더운 여름에는 냉장고의 한켠도 양보해주었었다. 생명이 있는 것을 돌보는 데에 재주가 없는 나는 이렇게 함께 1년을 보내준 이 마리모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낀다. 

- 올해의 이상한 물건 : 볼펜심
아이라이너는 다 떨어진 후에도 온갖 핑계를 대며 구매를 미루지만, 필기류는 화방에 갈 때마다 하나씩 주워오는 습관이 있다. 분명히 집에 있는 것을 아는데도, '언제 떨어질지 모르지'라면서 챙겨오기도하고, '이런 건 왠지 유용할 것 같다'며 바구니에 집어넣는 것이다. 올 여름에는 놀랍게도 가볍고, 필기감이 적당하고 가느다란 굵기의 유성 볼펜 하나를 발견했는데, 유성 볼펜 중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한 적이 없었던 나는 굉장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신나게 쓰다보니 당연히 볼펜심에 든 잉크가 닳는다. 그런데, 아무리 수소문을 해보아도 우리나라에서 이 볼펜심의 리필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품명과 길이, 직경 등을 최대한 자세히 체크하고 검색하니 일본 내에서만 유통되고 있는 심이었고 마침 라쿠텐에서 크게 부담되지 않는 가격으로 판매 중임을 알게 되었다. 볼펜심을 해외직구로 구하다니, 이건 좀 이상하다, 하는 생각을 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요즘도 볼펜심을 갈아끼울 때마다, 이 작은 볼펜심들조차 삼엄한 통관 과정을 거쳐서 내게 도착했을 것을 상상하면 웃음이 난다.


읽고, 보고, 경험한 것 리스트 / 2015.12.27
여느 해 보다 활동성이 떨어진 한 해를 보냈다. 다소 실망스럽지만, 2015년간 얼마만큼을 섭취했던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70권의 단행본을 읽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도서관에 갈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대부분 책을 사서 읽곤 했었다. 그러다보면, 자취생의 숙명인 이사의 순간에 늘어난 책짐이 너무 큰 고통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책을 까탈스럽게 고르게 된다. 그러나 이번 해는 대출 가능 시간에 도서관에 들를 수 있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 미미한 궁금증이 생기는 책이라도 빌려 읽을 수 있었다. 각별히 인상적인 책들은 따로 1월이 되면 정리할 계획이다.
+ 1 종의 시사주간지
크라우드 펀딩을 했더니, 한 시사주간지를 1개월간 보내주었다. 정기구독이라는 것을 잘 하지 않는 편인데, 국정교과서로 인한 이슈가 뜨겁던 시기라 다양한 관점에서 풍부하게 정리된 자료들을 받아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8종의 영상물을 보았다
영화나 영상물은 잘 보지 않는 편인데, 세어보니 의외로 많았다. '시간의 역사'를 읽던 과정에서 내용의 이해에 도움을 받은 영화가 올해 첫 영화였고, 태어나 처음으로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상영되는 영화 중 하나를 보기도 했다. 갑작스런 사고 이후로는 뭔가를 할 의욕을 거의 잃어버려서 시간을 채울 방법을 찾다가 예전에 좋아하던 시리즈물들을 이어서 보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찾아오는 몽유병 환자 같은 상태를 나는 잘 못 견디는 편인데, 올해도 딱히 나아지지는 않았다.

-2종의 게임을 했다
몸이 아픈데도 정신은 멀쩡한 때가 있다. 올해 초와 말에 그런 날들이 있었고, 예전에 추천 받았던 것들 중 몇을 앱스토어에서 받았다. 2년 전에 아이패드미니를 처음 샀던 것도 iOS에서만 지원되는 게임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되새기니 참으로 일관적인 사용이구나 싶다. 작년에 '아름답다'고 생각만하고는 시작을 차일피일 미뤄오던 퍼즐 게임 하나를 마무리하면서,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13개 정도의 전시를 경험했다
한꺼번에 많은 작품을 봐야하는 미술관의 특성상 커다란 미술관에 가면 급체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올해는 그래도 '고팠던' 것들이 있어서 기대하는 작업들이 전시된다고하면 그나마 기운이 좀 있는 오전에 가서 바라보고 왔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 리서치했던 작가의 작업을 우연히 마주치는 경험은 굉장히 짜릿하기도 했다. 검색을 하면 이미지와 영상으로 모두의 작품을 아주 작은 단위까지도 촘촘하게 살펴볼 수 있지만, 그래보았자 화면 속의 세상에 불과한 것인지, 몇 번을 본 작업인데도 실제로 보았을 때는 놀라움이 있었다.


두려움의 리스트 / 2015.12.22

나는 거의 매 주 한 번은 간이 자라다 말았냐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겁이 많은 사람이다. 겁 먹게 되어버린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도 있고,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무서운 것들 목록’이라도 탑재된 채로 태어난 것 마냥 근거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두려움들도 있다. 두려운 것들은 내가 무심하게 대할 수 없는 수 많은 것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확실하지 않은 것, 불투명한 것, 그래서 더욱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지만 동시에 위험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숱하게 꾸곤하는 꿈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지금 무엇인가를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많다. 명백한 악몽인 경우도 있지만, 두렵도록 아름다운 장면들도 있다. 나의 몸 혹은 마음에 반향을 일으켰던 것들, 올해 느꼈던 두려움들의 목록을 나열하다보면, 그 두려움들로 인해 내가 무엇을 했는지, 포기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소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한 해의 시작도 환자였고, 한 해의 마무리도 환자인 상태 그대로다. 1초의 소리를 내는 데에 성대가 200번 맞부딛히니 되도록 말을 줄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권고는, ‘소리를 내는 과정을 동반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문자로 하는 소통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듣는 일이 많아졌다. ‘수행 중이냐?’라고 물어봤던 사람들도 많았다. 딱히 그런 멋진 마음 자세로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 수행을 통해 얻는 깨달음보다 못할 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언가에 대해 쓸데없이 오래도록 생각하고 기록하는 일도 생겼다. 그 중 하나는 ‘노래'였다. 
나는 노래 부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내 목소리나 특정한 악기를 잘 다루는 것도 아니지만 대학시절에 코드를 조금씩 짚게 된 이후에는 이런저런 가사를 붙여서 노래를 만들어두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대부분 시덥지 않은 일상 속의 이야기인데다 곡도 지나치게 짧아서 트위터에 남긴 일기 같은 느낌도 들지만, 곡을 몇 곡만 더 써서 목표한 개수가 채워지면 가내수공업 앨범을 만들어봐야지, 하고 나름의 2015년 목표를 세웠었다. 그러나 올해는 내내 ‘노래하고싶다'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아주 많이 노력해야했다, 물론 쉽지 않았고, 어떤 때는 어마어마하게 실패했다. 그러던 중에 ‘대체 노래가 뭐길래? 넌 지금 이 상황에 노래할 기분이 나냐?’하는 날선 생각마저 들었다. 
여름, 지친 상태로 마무리해야 할 파일 하나를 열어두고는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서 좋아하는 뮤지컬들의 넘버를 찾아 듣고 있었다. 맨 오브 라만차의 번안된 테마곡들 중 ‘맨 오브 라만차'와 ‘이룰 수 없는 꿈'을 정말 좋아한다. 김종욱 찾기의 ‘Destiny’도 정말 작은 소품만으로 택시를 재현했던 장면이 그려져서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그러다 우연히 레미제라블의 영상들을 발견했다. 그러고보니 죽어가는 사람들, 고통스러운 삶을 마무리하는 사람과 이어가는 사람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앞에 두고 선 사람들 투성이인 극이다. 맨 오브 라만차도 마찬가지. 정신 나간 알론조 할아버지는 동네북처럼 맞고 다니고, 알돈자는 농락당하고 착취당하는 매일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이 다름 아닌 ‘노래'였다.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이 사라져도, 절대 몸 밖으로 끌어내지 못하고 남아있을 무기야말로 노래가 아닐까. 2016년에는 그것을 꼭 되찾아오고 싶다. 

두 발을 땅에서 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올해 태어나 처음으로 하게 된 활동들 중, 자전거를 타는 일과 클라이밍은 진심으로 생소한 일이었다. 나는 공중에 두 발이 뜨는 것을 진심으로 두려워한다. 심지어 비행기를 타고 있는 내내 긴장한 채로 손잡이를 꼭 붙들고 있는 통에 장기간 타고 내리면 손부터 저리고 몸살이 날 지경이다. 그런데, 클라이밍이라니. 왠지 알록달록한 장소와 친구의 강력한 추천으로 높이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음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처음이야 재미있고 쉽게만 느껴졌지만, 점차 경사가 기울어지면서, 높이가 높아지면서 매일 다가가는 그 장소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적당한 간격으로 팔다리를 뻗어 이동하는 것은 균형점만 잘 잡으면 안정감 있는 자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동작이 너무나 어려웠다. 공중에서 일종의 점프를 하며 발을 바꾸는 동작이었는데, 낮은 지점에서는 얼마든지 수월하게 할 수 있던 것이 끽해야 3m도 되지 않는 높이에 매달리니 불가능한 일로 느껴졌다. 1.발을 헛디딘다. 2.발을 바꾸는 동안 발에 준 힘 때문에 팔이 버티지 못한다. 3.떨어진다. 라는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끝없이 그려졌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발을 바꿀 필요가 없는 지점들만 짚으며 이동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보통은 같은 코스를 연습하는 사람들이 없는 평일 낮 시간대에 몇 주 전 등록했던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대학생들이 등장했고, 정말로 자연스럽게 발 바꾸기를 하며 그 코스를 연습했다. 멀리서 바라보니 어려워보이지 않았다, 높아보이지도 않았다. 낮은 높이에서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를 가만가만 생각해봤다. 낮은 곳에서는 되도록 손이 나아갈 자리만을 바라봤지 발을 쳐다보지는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어차피 아무 문제 없이 자리를 찾을테니까. 그런데 높은 곳에서는 손은 쳐다보지도 않고 발만 보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아래로 펼쳐지는 아찔한 광경은 덤이었다. 그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크를 손에 바르고 올라가서, 아무리 아래쪽이 궁금해도 내려다보지 않기로 했다. 만약 고개가 자연스럽게 아래를 바라보려하면 눈을 감아버리기로 했다. 매달리고 있는 벽이 뚫어져라 앞만 바라보고 발을 옮겼다. 거의 석 달을 끌어 온 과제 하나가 굉장히 가볍게 해결되는 것을 느꼈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두렵다고 생각한 것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데에는 나의 도움도 제법 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만든 것이 쓰레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건 정말 언제나 나를 괴롭히고 있는 생각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나 홀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닌, 나도 모를 사람들이 보거나 쓸 것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는 늘 온갖 종류의 두려움이 살뜰하게도 짐을 꾸려서 나를 따라온다. 4월의 어느 날, 스쳐지나가기만 했던 한 동네가수의 앨범을 직거래하며 나눈 이야기가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정도가 지난 후, 어떤 프로젝트 하나를 같이 해 볼 수 있느냐고 조심스런 제안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잘 알지 못하는 주제, 나는 내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덥썩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 죽도 밥도 안되는 이상한 것을 만들어낼까봐 겁이 났다. 일을 마무리할 때는 사라져버리지만, 시작하기 전에는 완벽을 추구하겠다는 의욕이 앞서서 일을 진행하는 데에는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껏 몸을 뒤로 빼고 어떻게 해야하나를 찬찬히 생각해보기는 했지만, 일단 해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근거 없는 마음이 먼저 들기는 했었다. 
그 주는 마침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이었고 만남을 가졌던 장소 근처에서 열리는 재미난 행사들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산복도로프로잭트에서 중앙동까지 함께 느릿느릿 걸어 이동했다. 고무신 선생님이 아이들과 함께 모여서 비막대라는 재미난 악기를 만들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40계단에는 지난 워크샵에서 만든 악기들이 매달려 있었다. 두께가 제법 되는 길다란 종이 원통에, 구멍을 작게 뚫어 소라형계단처럼 이쑤시개들을 촘촘히 꽂고, 작은 곡식이나 모래 같은 것을 넣은 후 원통 양쪽을 막은 것이 이 비막대였다. 막대를 기울이면 어떤 소리가 나는데, 자신의 비막대를 만든 아이들은 그 소리가 무엇인지 저마다의 소리 이름을 붙여두었다. 각양각색의 이름 중 하나, ‘ㅇㅇ의 좋은 마음 소리'라고 적어둔 것이 있었다. 좋은 마음에서는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좀전까지는 비 내리는 소리처럼 느껴지던 것이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마음 소리’처럼 들렸다. 
어쩌면 내가 너무 큰 욕심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만들어낸 것을 모든 사람이 좋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이건 마음 소리야'라고 하면 ‘응 그렇구나, 이건 정말 마음 소리야'라고 답해줄 사람 하나만 있어도 괜찮다, 그리고 지금 작업을 제안해 주었던 이 사람은 그럴만한 사람일 것 같다, 하는 마음. 그 이후부터 시작된 여러가지 작업들의 본격적인 시작과도 같은 주간 불현듯이라는 작은 매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만드는 데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이 너무 낯설어서 애를 먹었지만 이번 해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다. 돌아보니 인쇄소, 종이, 디자인, 사람들, 이야기들- 2015년을 채운 대부분의 것들이다, 두렵게만 느껴지던 많은 것들이기도 하다. 지금도 물론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는 두려움에 떤다. 그렇지만 더도 덜도 말고 어떤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마음이 나아진다. '좋은 마음 소리'를 같이 들을 수 있는 사람들 덕에 2015년은 조금 덜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었다.

+
지난번에 써 놓은 글은 '리스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글 같더라고요. 그런데 낱개 항목으로 나열하기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 항목이 많고... 어떻게하나 궁리하다가 항목을 대폭 줄인 리스트를 다시 썼습니다. 


YKSQZME(익스큐즈미)

잡종.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밥.’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 밥을 여기저기 퍼나르는 방법은? 미디어.’ 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디어를 더불어 공부했다. 밥을 실어나를만한, 마음에 쏙 드는 미디어를 찾아 헤매다보니 기획자와 교육자와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잇는 사각형 안팎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편식 및 리셋 증후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Excuse me하며 사과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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