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닭과 포트폴리오

병원에 가던 길이었다. 옆으로 치킨 프랜차이즈에 소속된 식자재 운송차량이 지나갔다. 운전중인 아빠에게, “아빠, 가축이 되기 전에 닭은 날아다니기도 했나?”라고 물어보았다. 닭장에서 벗어난 상태로, 사료 대신 스스로의 힘으로 먹이를 찾으며 종을 보존해나갔을 닭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부리가 좀 더 크고 뾰족했을까? 날개가 커서 독수리처럼 날아다녔을까? 싸움용 닭도 있긴하지만 그것은 닭들끼리의 게임 아닌가? 지금 같은 모습이라면 다른 동물한테 잡아먹히기 딱일텐데? 머리에서 흘러가는대로 떠들고 있다보니 이게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는 것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빠는 대답할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하나의 종이 포식자들로 인해 소멸되지 않을 수 있는 방식으로는 두 가지 정도의 안이 있을 것 같았다. 하나, 각 개체의 전체 수는 적더라도 아주 강하거나, 둘, 개별적으로는 약한 개체이지만 한 번 번식할 때마다 먹이사슬에 희생되는 양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큼 많은 자손을 남기거나. 야생의 닭이 상위 포식자였을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만약 그랬다면 인간의 손에 의해 사육된 역사가 길어 많은 변화가 더해졌을지라도 지금 같은 모양으로 길러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둘째 안만 남는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마코위츠의 포트폴리오 이론을 떠올리고 있었다. 투자를 할 때, 높은 기대수익이 예상되는 상품에 모두를 걸지 않고, 예상되는 위험과 수익을 함께 고려하여 최적의 비율을 구해서 안전한 상품의 조합을 만들어낸 것을 포트폴리오라고 부른다. 시장에 새로운 뉴스가 전해질 때에, 그것을 반영해서 어떤 것의 가격은 오르고 어떤 것의 가격은 내려가는데 이렇게 포트폴리오를 구성해두면 그로 인한 충격 혹은 손실을 분산할 수 있다. 결국, 이론적으로는 기대수익을 언제나 같은 값으로 유지가능하다. 


포트폴리오는 ‘선택과 집중'과는 거리가 있는 말이다. 인생은 한 방, 같은 말과도 거리가 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들에 기반을 두고 시작하는 이 선택의 묶음은 다양한 확률적 시나리오를 고려하고서야 채워질 수 있는 복합적인 답안이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 남기고 다른 것들은 모두 포기하는 것이 이제는 현명한 안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포트폴리오와 같은 사례를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같다.


야생의 닭이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종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는지는 조사를 해 보아야 알겠지만, 현대의 포트폴리오 이론이 생태계의 역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일상 속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는 사례가 되었다는 것도. 서로 상반된 특성의 상품을 진열해 둔 가게에서, 동서남북으로 달리고 있는 다양한 유아교육시설들의 차에 탄 아이들에게서, 올해 내가 세우고 있는 신년계획에서도 포트폴리오가 가진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주식에는 기대수익이라는 수치화된 목표가 있고, 내 상상속의 야생닭에게는 종의 보존이라는 (그들에게는 지상최대의) 미션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시간을 쪼개고, 계획을 세우고, 일과를 정돈하는 걸까. 나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한 사람일까, 아니면 거대한 목적을 가지고 꾸려진 커다란 포트폴리오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걸까. 


보이는 병들과 보이지 않는 아픔들

병원 접수를 기다리며 대기하는 자리에 앉아있다보면 이 도시는 환자만 사는 도시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교적 큰 규모인 병원인데도, 매 번 접수를 할 때마다 대기실 의자에는 사람들이 가득 앉아있다. 번호표를 받고 내 차례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책을 읽을만큼 길지도 않고, 그렇다고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만큼 짧지도 않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종종 접수대로 나오는 사람들의 병이 무엇일지 상상해보는 놀이를 한다. 비교적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질환들도 있고, 환자인지 환자의 보호자인지 구분해 낼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제법 된다. 


그 사람이 어느 과로 갈 것인가를 맘대로 추측하다보면, 질환이 드러나서 즉각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들보다, 스스로는 고통스러운데 도무지 외관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병들이 더 괴로울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그나마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에 드러난 증상들로 ‘이런 치료가 필요하다'는 답을 곧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아픔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어디에 가야 하는 걸까, 지금은 어느 곳에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병원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있지만, 서로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얼마나 기다렸느냐와는 상관없는 짧은 진료를 마치고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다. 전기치료를 받는 과정은 나와 기계, 둘만의 일이다. 간호사분은 기계를 켜고 끄는 역할만을 수행하고는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안전하게 작동할 것이 분명하지만, 사람이 아닌 기계가 몸에 달라붙어있는 상황은 언제나 두려움을 준다. 감전되면 오늘 저녁 뉴스 사건사고란에 3초 정도 나오려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몸이 오작동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자신을 치료해주고 있는 기계가 오작동할까봐 도리어 걱정하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지상파 방송국의 경우 골든 타임에 나가는 광고료는 초당 얼마나 될까? 그럼 3초엔 얼마지? 내 죽음은 얼마짜리야?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기이한 책 읽기 

가치라는 것은 뭘까? 본질이란 뭘까? 하는 질문은 고기집 바닥에 눌러붙은 기름때처럼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목격하기 어려운 가치들은 그것을 담기에 적당한 그릇과 함께 전달되고, 비로소 인지된다. 그릇이 없으면 바닥에 흩어지고 말 국, 빈틈없이 메꾸지 않으면 운반할 수 없는 헬륨 가스처럼. 담고 있는 그릇이 그 모양을 달리해도 속에 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겉모습을 가치 그 자체로 인식하게 되는 위험한 동일시의 순간이 온다. 이것을 약삭빠르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어설픈 이용의 순간을 목격할 때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내용보다 과장된 포장, 핵심으로 바로 다가가지 못해 어정거리는 말들, 더 눈에 띄게, 더 화려하게가 전부인 요구들은 그릇을 만드는 데에 활용된다. 프레임이 가진 힘은 명백하다. 별 것 아닌 낙서도, 잘 짠 액자에 걸어서, 갖추어진 장소에 건다면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질 수 있다. 루브르에 놀러갔던 친구가 자신의 소지품을 그럴듯하게 빈 선반에 세워두자 관람객들이 모여들어 유심히 보고 갔었다는 이야기를 접했을 때, 뱅크시가 미술관들에서 시도했던 작은 전복들을 떠올렸다. 지금은, 매 이슈의 진위여부를 파악할 수 없을만큼 벌어지는 일이 많고, 사람들은 바쁘다. 그런 상황에서는 정황이나 환경이 가치의 자리를 얼마든지 꿰어찰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한 친구가 생각난다. 그는 꽤 자주 책등이 사라지고 해체되어버린 종이 뭉치로서의 책을 들고 나타나서 “나 이거 버릴건데 혹시 관심있는 책이면 주고 가려고.”하며 묻곤 했다, 대부분은 관심사가 달라서 그런지 그 종이뭉치를 받아오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는 그 때의 내가 보기에는 유별난 독서가였다. 언제나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소유한 책은 적다고 했다. 이런저런 짐을 많이 들고다니는 것은 질색이라며 외출할 때에도 타블렛 한 대 정도를 챙겨들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가 책을 사면 제본되어있는 책등은 절단하고 내지를 모두 스캔하여 pdf로 변환했다. 그리고는 NAS로 활용하고 있는 그의 집 컴퓨터에다 모든 책을 저장하고, 집 밖에서는 늘 들고 다니는 타블렛으로 그 책들에 접근하여 읽어나가는 것이 그의 독서였다. 잘리고 스캔된 이후의 책들을 아무 표정 없이 폐지처럼 대하는 것이 꽤나 큰 충격이긴 했지만 전자책화 되어있지 않은 책까지도 자신에게 필요한 포맷으로 만들 방법이 많이 보급되어있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이 일단은 신기했다. 


그에게 책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정보를 실어주는 물리적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 나 역시 전자책을 읽기는 하지만, 종이책 형태로 나온 것의 포맷을 바꿔버릴만큼의 적극성은 없다. 그렇다보니 자신의 삶의 방식에 맞게 데이터를 정리하는 그의 방식이 급진적으로 느껴졌고 처음에는 거부감도 들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니, 그 성실함이란. 게다가 얼마나 간결하게 사는 사람인가 하며 감탄하기도 했다. 내가 지금까지 책을 읽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는 ‘책’이라는 이름이 내용과 물리적인 모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여겨지는 단어였지만, 이것이 분리될 수 있다면 나는 어느 쪽을 택하게 될까? 


어떤 가게에 대한 생각

추상적인 개념을 볼 수는 없지만, 분명 경험함으로써 체득할 수는 있다. 사랑, 평화, 정의, 행복, 지혜 같은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가치들 혹은 모욕, 죄책감, 파괴, 무지와 같은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가치들을 단어의 형태로 늘어놓는다. 그리고 스스로가 이 행위를 발견하는 방법들을 고안해내는 것, 혹은 실행해보았던 경험들을 돌이켜본다. 이런 행위를 통해, 허위로 만들어진 맥락에서 벗어나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작은 가게 하나를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 곳은 모든 것을 팔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팔려나가지는 않는 것과 같다. 가치 있는 물건들이 담겨있을 것만 같은 포장을 한 상품들 각각에는 모두가 필요로 하는 가치들이 각각 아름다운 라벨과 함께 진열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비싸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방문객이 입장시에 참여하는 간단한 설문을 통해 방문자가 지불가능한 가격대의 판매가를 세팅해둔다. 구매한다는 행위 외에 이 작은 상자들을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동시에, 구매력만 확인된다면 그가 실제로는 어떤 사람이건 간에 이 상자들을 소유할 수 있다. 


용기, 인내, 창의, 사랑, 지혜와 같은 가치들이 진열된 곳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과연 살 것인가? 만약 산다면 대체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외형뿐인 상자를 집의 잘 보이는 어딘가에 놓아두거나 혹은 오즈의 마법사에 나왔던 주인공들처럼 몸에 품은 채로 돌아다닐 것인가? 아니면 그 가게에 이르지 못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차익을 남기며 새로운 거래를 이어나갈 것인가? 


이 가게를 상상할 당시의 나는 오래된 신화 마냥 의심도 없이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현대의 Myth들이 가진 힘이 궁금했다. 믿는 순간 실현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기 극복의 조언 같은 것들, 그리고 구매하는 사람이 그 이미지가 될 수 있는 것 마냥 유혹하는 것들 말이다. 


얼굴로 찾는 사람과 등으로 찾는 책

어떤 물체라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개성이 응축된 부분이 하나쯤은 있는걸까? 자신을 규정지을 수 있는, 다른 것들과 구분되는 확실한 한 부분. 사람에게 그것은 보통 얼굴이고, 책은 보통 책등을 통해 내가 찾고 있던 정보가 맞을지, 아닐지의 감을 잡는다. 따지고보면 책의 얼굴격인 북커버가 있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책등은 책의 옆모습 같은 것이기는 하다. 그런데 이름을 ‘등'이라고 붙여두니 뒤돌아선 사람의 등을 툭툭쳐서는 ‘저기요'하고 돌려세우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는 얼굴을 마주보며 인사를 하지만, 책은 등을 바라보며 첫 인사를 한다. 사람이 뒷모습을 보게 되는 순간은 만남의 순간보다는 헤어짐의 순간인데, 뒷모습으로 시작을 알려오는 것이 책이라는 점은 재미있게 느껴진다. 일반적인 서가에 있는 책의 얼굴은 숨겨져 있는 시간이 더 길다. ‘낯이 익다'라는 표현이야말로 책들에게는 쓸 수 없는 표현이 된다. 


도망자들을 잡기 위해 공유되는 몽타주는 주로 얼굴 그림이나 사진이 대부분이다. 사람은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것에 대해 긴장하고 더 붙들기보다는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 같다. 신년운세, 거짓 선지자 그리고 서점에 자리한 미래 트렌드 예측 서적들. 모두 다가올 것들에 대한 궁금증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도록 만든 것들이다. 사람의 경우로 따지자면 무언가가 다가올 때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얼굴. 한 눈에 들어오지만 가장 복잡하고도 많은 요소들이 들어차 있어서 고유한 암호 같기도 한 상대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책도 얼굴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전자책과 종이책 사이를 가르는 어마어마한 차이 중 하나는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가상의 서재에 꽂힌 가상의 책들이 보여주고 있는 책의 얼굴들 말이다


옆모습이나 등만 보고는 사람을 착각하여 부르기 쉽다. 그래도 큰 문제는 없다. 죄송합니다, 하고 떠나도 되고 그것이 인연이 될 수도 있다. 책의 등도 마찬가지로, 옆모습을 보면서 오해하여 읽기 시작한 책들이나 기대와 크게 다른 책도 큰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한 번 불러보기 좋은 것이다, ‘저기요!’. 그 과정에서는 큰 긴장이나 두려움 가득한 스캐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건 대체 뭐지?하는 호기심이 지배적인 감정이 된다. 


책이, 그렇던 책이, 이제는 모두 몸을 돌려 각자의 얼굴을 내밀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얼굴조차 아니다. 물리적으로는 이 곳에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듯한 환영만 남은 얼굴이 나를 유령처럼 뚫어져라 바라본다. 사실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애초부터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긴 했었지만. 


얼굴이 없는 이야기

나는 이렇게 길고 이상하고 조각난 이야기들을 하나의 이야기 안에 꼭 같이 써야한다고 생각했다. 일련의 조각들이 조금씩 비슷하고, 또한 겹치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이야기에는 닮았네마네 할 얼굴이 없다.



YKSQZME(익스큐즈미)

잡종.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밥.’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 밥을 여기저기 퍼나르는 방법은? 미디어.’ 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디어를 더불어 공부했다. 밥을 실어나를만한, 마음에 쏙 드는 미디어를 찾아 헤매다보니 기획자와 교육자와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잇는 사각형 안팎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편식 및 리셋 증후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Excuse me하며 사과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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