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이다. 매 달 첫째 날이 되면 달력을 ‘쓴다’. 지금까지 탁상용이나 벽걸이용 달력은 곁에 둔 적도 없었는데, 올해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벽에 걸어서 보세요, 접어서 들고 다니세요, 붙이세요' 같은 용도가 있는 달력도 아닌 종이 뭉치를 나 좋을대로 문서용 집게에 꽂아서 벽에 걸어두고 쓰고 있을 따름이긴 하지만. 6장의 국제표준에 맞는 B4사이즈 종이, 앞면과 뒷면을 모두 사용하여 만들어진 이 달력. 매 달 다른 사람의 손글씨로 적힌 듯한 숫자들 중에 휴일은 빈 칸이다. ‘일요일 공휴일은 직접 써 넣으십시오.’ 라는 자그마한 안내만이 하단에 적혀 있다. 1년간 만난 사람들에게 손글씨로 쓴 숫자를 받아서 만든 달력이라서 매 달의 글자 주인이 다르다. 나는 그 숫자들과 어울리게 빨간 색연필, 싸인펜, 볼펜 등을 들고 그 달의 글씨를 흉내내어 휴일들을 기록한다. 이 과정은 꽤 재미있다. 휴일의 숫자는 빠져있지만, 인쇄되어있는 다른 글자들을 보면 어떤 숫자를 흉내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군더더기 없이 충분한 힌트인 셈이다. 이번 달의 글자 주인은 5의 위쪽 가로선을 길게 늘여쓰는 특징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열심히 재현했다. 이제 한 바닥 남았네, 내년도 달력도 만드셨다면 구하고 싶다, 는 생각에 디자이너분에게 메시지를 드렸다. 마침 다음 달 부산에 오실 일이 있다고 하시기에 차를 대접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 달력은, 그를 만나야만 구할 수 있는 달력이기에.


이 달력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한다. 한 학생이 삼선동의 주택가에 있는 한옥 중 하나를 구해다 카페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러갔던 때다. 그는 3년 전 봄 학기, 한 사립대학교의 시각디자인학과에 출강하고 있을 때의 수강생이었는데 본인의 관심사를 언제나 스스로의 몸에 담아내고 쏟아내는 과정이 내게는 늘 흥미롭고 대담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전공과 다른 관심사들을 소화해나가는 과정에 박수를 보내던 중, 나는 그녀에게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을 배우기도 했었다.) 그렇게 이어졌던 인연, 그녀가 꾸린 공간 안에서 만난 모든 것들 - 아기 고양이(5월에 와서 이름이 오월이다, 이제는 청년 고양이가 다 되어서 늠름해졌다), 고즈넉한 내부에 현대식으로 갖춘 공간인 주방과 바, 세심함이 엿보이는 조명과 정원의 자갈들, 지나치지 않게 피워둔 향, 린넨으로 만든 폭이 넓은 앞치마, 조용한 음악,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달력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연필로 직접 써서 만든 것으로 느껴졌기에 손으로 살짝 만져보았는데, 의외로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찍어 낸 이상 세상에 두 개 이상은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한데, 제작자의 이름도, 가격도 적혀 있지 않았었다. 갑자기 달려든 오월이의 재롱에 정신을 빼앗겨서 묻지 못하고서 돌아왔었고 한 동안 그 달력을 잊었다. 


그리고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은 2014년 가을, 늘 한 번 쯤 만나보고 싶었던 한 사람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린디자이너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한 윤호섭 디자이너분. 그 이름을 고민 투성이이던 대학 졸업 학기에, 누군가가 보내준 이메일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 후로도 관심사를 쫓아가다보면 꼭 이 분의 이름이 등장했지만, 친구 신청을 할 만큼의 계기가 아직은 없으니까 낯선 이름을 검색해서 페이스북에서 멀찍이 바라보고 홈페이지나 뒤적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한 특강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마침 나도 그 때의 일정이 비어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수업 시간에 잘 앉아있는 편은 못 되는 사람인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신청을 했다. 내가 수업하는 것도 아닌데 긴장이 되어 소화도 못할 정도로 두근거리며, 점심으로 먹던 샌드위치는 반이나 남겨 가방에 넣은 채로, 아직은 사람들이 다 차지 않아서 조용한 강의실에 들어갔다. 그 자리 하나하나에, 몇 달 전에 보았던 그 달력이 놓여있었다. 


현장에서 들은 수 많은 이야기들 중 어느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달력에 관한 것으로만 범주를 줄여보자면 덜어내는 과정이 도리어 충분함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낸 프로세스가 인상적이었다. 가장 먼저 종이 선택. 인쇄물 디자인이 완성되는 단계에서는 그 내용이 실릴 종이가 늘 필요하다. ‘친환경’ 하면 재생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것만이 답은 아니다. 제지사에도 잘 나가는 종이가 있고, 안 나가는 종이가 있다고 한다. 기왕 만들어진 종이 중 사용되지 않은 것들을 사용한다면 그것 역시 친환경적인 방식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한 제지사에 들렀을 때, 쌓여있던 재고를 보고서 반색한 그는 그 종이들에 자신의 디자인을 담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그 6장(안내문이 적힌 아주 작은 종이까지 보자면 7장) 중 어느 하나 같은 종이가 없다. 


친환경 인쇄물 제작에 있어서 석유용제를 사용하지 않고 콩기름잉크로 인쇄하는 것은 익숙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 달력의 재미라면, 무엇보다 색상을 검정색으로만 남겨서 잉크 사용을 최소화한 부분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공휴일도 명도가 다른 먹색으로 칠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부분을 지워버렸다. 미완성된 달력을 완성하는 순간은 디자이너가 아닌 달력 사용자에게 주어진다. 환경에 대한 인식과 실천은 어느 한 사람의 어마어마한 능력 혹은 헌신으로 완성해 내는 완벽한 계획이라기보다, 모두가 일상 속에서 조금씩 구체화 해 나갈 때 더욱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무엇보다 이 달력 속 글자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의 손으로 채워져있는 참여적인 디자인이라는 점에서도 물론 아름다운 생각이라 여겨졌지만(분명, 이 달력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글자를 받기 전에 설명해야 했을 것이므로 그 과정에서도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한 순간까지도 최종 이용자가 이 과정에 참여하게끔 만드는 지혜에 무릎을 탁 쳤다. 


무엇보다 이 달력은, 디자이너 스스로가 위 공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간략히 전하며 배포한다. 설명서 없이 ‘쿨하고' ‘직관적인' 것들이 추앙받는 때에, 이것을 직접 만든 디자이너가 말을 걸다니. 그러니까, 어디선가 스타일이나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구매했던 다른 물건처럼, 금액을 교환하는 방식으로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 달력의 값은 어쩌면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듣기 위해 귀기울이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또한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보며 약속하기일지도 모르겠다, 대화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당장 하루 전의 일만 돌이켜보아도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얼마나 잘 잊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내가 개입했던 대화에 한해서는 그 말들이 귓가에서 얼마나 오래도록 메아리치던지를 기억해본다면, 물건 하나를 삶에 더할 때마다 이런 대면의 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디터 람스의 유명한 경구인 Less is More, 이 말이 무조건 많은 것을 없애버리자는 게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불필요한 무언가가 빠진 자리에 설명이 들어서는 순간도 필요하지 않은가. 그저 기능을 전달하는 것 외에, 그 기능을 고안한 이의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시장에서는 종종 생략되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가만히 앉아만 있던 사람에게 주어진 똑똑한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것, 하나의 키워드를 꼭 붙들고 발걸음을 옮기고 부딪히며 얻은 배움 끝에서 얻은 통찰이라는 사실 앞에 겸손해진다. 일요일 오전 11시, 인사동 골목 어딘가에서 낡은 티셔츠에 녹색 페인트로 돌고래며 고깔 쓴 웃는 얼굴, 별 등의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어떤 할아버지를 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 일 것이다. 옷장 속에 티셔츠가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어느 날, 그것에 예술가가 그림을 그린다면 또 새로운 가치가 더해지겠다라는 생각에 시작된 ‘티 그림 그리기’. 그 과정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주고 받은 대화의 경험 역시도 그가 이 ‘달력' 하나에 메시지 전달의 과정을 응축해 내는 데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일반적으로 그린디자인 혹은 에코디자인이라고 불리는 작업들은 친환경 프로세스를 따르는 경우도 많지만, 이런 것을 ‘유행' 정도로 인식한 이들도, 진솔한 느낌만을 카피하여 ‘친환경인 척'하는 것들도 쏟아져나오고 있다. 보통 이러한 행태를 ‘그린워싱(greenwashing)’ 이라고 부르는데, 본질적으로는 친환경과 아무 상관이 없으면서, '그런 척' 하는 것들이 이런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겉으로는 녹색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새빨간 거짓말에 가깝다.(수박이라면 먹을 수 라도 있지.) 워낙 바쁘다보니 한 번 더 들여다 볼 시간이 없어서 속는 사람들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이 달력처럼 재미나고 살아있는 이야기들이 담긴 디자인을 마주하면 벽돌 하나에도 미장한 표면의 긁힘 하나에도 지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 집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이야기 중에서도 직접 그 주제를 고민했던 사람의 이야기 앞에 나는 속수무책이다. 이것을 ‘왜' 이렇게 했어요? 라며 궁금해하는 사람도, 그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곰곰함을 가진 사람의 태도에도 자연스레 끌린다. 그것이 솔직하면 솔직할 수록 더더욱 말이다. 일상의 작은 부분들에서조차 그런 이야기들이 부재한 세계라면, 그 헐거운 토대 위에 거대한 것들이 제대로 세워질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한다. 오해가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이것은 얼마나 잘 완성되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며, (오감으로는 지각하기 쉽지 않은) '생각'이 얼마나 튼튼한가에 관한 고민에 가깝다. 지금은 보잘 것 없는 상태인 것들이라도 (시각으로 감지되는 것이라면 외형적인 것들, 무형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라면 성숙도 등등 완성도에는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지) 그 본질을 잘 꿰뚫고 있는 것들, 그러니까 질문과 답의 세트가 잘 맞아 떨어진 조각들로 짜낸 것은, 그것이 어떤 탈을 쓰고 존재하건 분명 튼튼할 것이다. 보통은 하나의 질문에 대응하여 내민 가장 자신다운 하나의 답이 좋은 조합인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 하나만 지킬 수 있다면 무엇을 지키겠는가?라고 하는 때에 한 박자 고민 후 돌려주는 답은 괜찮지만(참으로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니까) 영영 답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만 있는 것은 곤란하다. 일도, 삶도, 관계도, 그것이 모아져서 역사에서도. 내가 정말로 가깝게 지내고 있던 사람 중에 모든 것을 지켜보겠다고 했던 한 사람은, 정작 무언가를 지켜야 하는 순간 앞에서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도대체 누가 그랬냐고? 2014년의 나.



YKSQZME(익스큐즈미)

잡종.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밥.’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 밥을 여기저기 퍼나르는 방법은? 미디어.’ 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디어를 더불어 공부했다. 밥을 실어나를만한, 마음에 쏙 드는 미디어를 찾아 헤매다보니 기획자와 교육자와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잇는 사각형 안팎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편식 및 리셋 증후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Excuse me하며 사과할 일이 많다.




*그 달력이 대체 뭐길래,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 한 번 찍어두었다. 올해의 달력 중 일부, 빨간 글씨는 못난 내 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