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hwp

 

생활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순간이 너무 많다. 우리의 예상보다 생활이 극단적이기 때문이겠지. 조금 전, 테이블 위에 남은 맑은 차가 아직 따뜻할 때 생각했다. 카페에 거의 매일 오시는 단골손님, 오픈이후로 정말 꾸준히 오고 계신다. 점심시간이 지난 12시 30분 무렵이면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특별히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 말고는 항상 카페라떼를 시키는 분. 연세가 벌써 80이 지난 노년의 어른이시다. 오늘은 자주 같이 오는 친구 분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설거지며 대추고명을 만드는 일을 손으로 부지런히 하면서 귀로는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어디가 아프기라도 하면 엄살을 부리며 엄청 과장해서 신경을 쓴다며 그럴 필요 없다고, 나이가 들면 당연한 거라고 친구를 계속 해서 안심시키는 말들. 자기보다는 오래 살거라고 몇가지 그럴듯한 근거까지 들어가며, 친구의 삶을 받쳐주는 응원의 말들은 계속된다. 잠시 친구가 화장실에 간 사이 “이 친구는 이렇게 안해주면 계속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서 저승사자가 보인다는 등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니까 안돼요. 내가 그래서 얘기해 주는 거야” 하시며 웃으신다. 자리에서 일어서시면서 1살 차이나는데 나한테 형노릇 하려고 한다며 계단을 내려가시는데 다시 아웅다웅이시다. 서로 뒤에 서겠다고. 친구분이 다리가 안좋으셔서 지팡이를 짚으시는데 옆에서 걸으며 가방끈을 꼬옥 잡으신다. 이러면 넘어져도 내가 잡아줄 수 있으니 괜찮다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두 노년의 신사 모습을 보았다. 스스로 어떤 풍경이 되었는지 모를 것이다. 그들이 생활이 나에게는 풍경이 된다.

 

친구들의 오랜 작업의 결과물이 잘 여물어 10월에 맺혔다. 그 덕분에 나는 하는일없이 쉬는 날이 매우 바쁘게 되었는데 생각다방산책극장에서 내가 일과 놀이를 만들어 친구들을 초대할 때와는 참 많이 다른 느낌이다. 그들의 초대에 내가 응하여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일 이었구나! 하고 비로소 알아채고 있는 중이다. 평일에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서 휴일에 함께 놀았던 그 시간이, 지금에 와서 다른 깊이의 고마움으로 도착했다. 고마웠다. 드디어 내가 축하하고 격려하고 지지하고 응원할 차례가 와준 것이다. 성매매 집결지 완월동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정희씨의 <완생 Project>전시, 건형씨의 <손그림,일그림,삶그림,계속그림> 그림책 출간 , 솔밧과 패트릭의 <자연농 다큐>상영회. 곁에서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지켜봐 온 감격적인 날들이다. 나는 그저 그 때에 함께 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전부인지라 조용히 박수치고 기뻐하는 것 밖에 못하지만 내심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음을 알아주기를. 선물이라도 하고 싶은데...생각만하고 다시 그 자리에 그냥 가있는 것 밖에 못하겠지만 나는 그곳에 있기로 결정했다. 나의 곁을 지켜준 친구들이니까.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응원할 준비가 조금 된 듯하다.

 

백년어서원에서 1년에 한 번씩 내는 개똥철학이라는 도서에 원고를 쓰기로 했었다. 주제가 “장소”였고, 벌써 한 달도 전부터 나를 쫄쫄 따라다니는 주제이지만 도저히 장소를 정하지도 못해서 은근슬쩍 원고내기를 미루고 있다. 처음에는 당돌하게 <생각다방산책극장>에 대해서 써보겠다! 고 했다가 그것이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무게로 짓눌려져서 손사래를 쳤다. 그래서 다음 주제로 생각한 것이 나를 있게 하는 곳 혹은 느낌이라는 장소로 그림에 대해 써볼까? 하다가 이것도 너무 억지스러운 것 같아서 지웠다. 그리고는 “장소..장소...장소... 무엇이 좋을까? 장소는 무엇인가? 지명? 그래 지하철을 타고 못골역을 지나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몸의 기억, 몸에 새겨지는 장소의 기억? 잠시 앉았다 일어났던 자리에서도 장소는 만들어지니까....기차역 대합실 혹은 편안한 집 등 나를 둘러싼 공간에서 느껴지는 각각의 고유한 공기가 장소로 살아나는 것. 수화. 손으로 대화하는 사람의 말이라는 장소...” 아 너무 많아서 못 골랐다. 그러다 오늘 갑자기, 사람이 장소! 친구들이 나를 있게 하는 장소! 지금 있는 그곳의 당신이 생각다방산책극장입니다. 라고 말했던 그 당신, 생각다방산책극장이라는 장소였다. 그리고는 글을 쓸 더 이상의 말은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원고는 쓰지 않기로 했다. 이미 편집이 들어가서 도중에 뒤늦게 보내는 원고는 반갑지 않을 것이라는 핑계를 붙여서. 하지만 겨우 발견한 생각을 더 이어보기로 했다.

 

최근 들어 꼭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하나 생겼는데 식상하고 이상한 제목을 하나 붙여보았다. <영혼의 순례길> 이것은 10월 초, 티켓을 사두고 결국 보지 못한 부산영화제상영작 제목이다.(너무 보고 싶었지만. 영화가 끝나고 해운대에서 대신동으로 넘어오는 1001번 만원버스를 타고 돌아올 생각을 하니 너무 악몽같아서 포기했다.) 쉼터 당직 일을 올해 12월까지만 하기로 했으니, 내년 1월부터는 금토일이라는 휴일이 나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그동안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서 가지 못한 너무너무너무 보고싶은 사람들을 만나러 가기로 한 것이다. 선물도 하고 싶은데 그럼 선물을 준비해서 갈까? 이왕이면 그 친구에게 적절한 것이면 좋겠다. 아..그래도 부족한데...그림을 그리자! 어떤? 음... 친구를 만났던 그 장소와 시간을 기록하는 의미로 그리자. 친구의 얼굴도 (아마 못생긴 그림이 되겠지만) 그려보고, 하나 약속을 할까? 내가 친구를 만나는 순간만큼은 그 순간에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해보는 것....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 생각을 엮었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고 싶고, 그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우리의 현재를 마음껏 나누고 웃고 함께하고 싶다. 이 마음을 가지고 떠나기로 했다. 약간의 도구들을 챙겨서. 신난다! 타로를 공부하고 있는 나는 잊지 않을 만큼만 일상 속에 타로를 대입해 보고 있는데, 최근 선생님에게 받았던 상담을 조언 삼아 몸은 힘들지만 관계속으로 들어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훈련이자 연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참 어려운 일이고 힘든 과정인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아직 서툴고 어렵기만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것이 참 어렵다. 혼자 살수도 없는 노릇이니 배우고 겪을 수밖에 없을것이다. 오늘 테이블에 앉은 손님이 그랬다. “그때가 참 좋았었다고 깨달았는데 이미 지나고 없는거야, 그 시간이”

 

지나버리더라도 내 앞에 놓인 지금 이 시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