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절 읽기 모임 2회, '몸의 일기(다니엘 페나크, 조현실 옮김, 2015)'


눈에 띌 정도의 큰 변화는 없지만, 매일 나는 죽고 또 다시 태어나고 있다. 어느 하나 어제와 같은 것이 없으니 지금의 내가 과연 어제의 나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인지도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세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각질로 이 곳 저 곳에 흩어지고 그 저변에 있던 새로운 몸이 마치 원래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인양 머문다. 직전에 죽어야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과정인 삶은 죽음에 기대어 서 있을 때에만 비로소 지각되기 시작하는 듯 하다. 


국가라는 덩어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개인의 죽음과 탄생이 이어지는 하루하루보다 상대적으로 길게 존재하면서, 그 죽음들에 기대어 역사라는 것이 한 줄 두 줄 채워진다. 그렇다면 일기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에서만 볼 수 있는 역사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Journal d’un corps를 보자마자, 나는 ‘시체'를 뜻하는 단어인 corpse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사후적인 기록이기도 한 일기, 어쩌면 죽어버린 몸이 남기고 간 그림자 같은 기록. 이렇게나 경쾌하고 재치 가득한 책을 읽고 나서 내내 죽음만 생각하고 있다니, 계절 탓이겠지. 겨울이 다가온 것이 느껴진다. 


전쟁 이후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은 아버지의 생을 회복시키기 위한 어머니의 노력으로 태어난 일기의 주인이지만 거대한 역사가 한 번 죽인 몸은, 작은 역사들의 생동감 넘치는 회복만으로는 나아가던 방향을 전환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중으로 고아가 되(p.62)”어 버렸다. 어머니는 그의 ‘죽음'을 잊으려는 시도에서 시작하여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계된 ‘병', 그 병을 유발시킨 ‘전쟁', 그리고 다시금 전쟁에 참여했던 ‘그'에 관련된 모든 것을 제거해버림으로써 죽음을 기억에서 몰아내려 한다. 몸도 죽었지만, 몸을 둘러싼 맥락도 죽어버렸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아버지가 잘 심어두고 간 아들의 내면만큼은 그녀도 몰아내지 못했다. 


“내 손이 크레파스를 잡을 수 있을 때부터 난 이 수채화들에 테두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빠는 화내기는 커녕 오히려 날 도와주었다. 내 손 위에 당신 손을 얹은 채 자신이 붓으로 그려놓은 형체 위에 내가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윤곽선을 그리도록 도왔다.” - <몸의 일기> p.206 


수채화는 테두리가 없는 그림이다. 뚜렷한 선이 없는 아버지, 그리고 그가 그려 둔 이 수채화들에 아들은 윤곽선을 더하면서 글자를 쓸 준비를 시작한다. 유령 같은 아버지의 암송하는 인용구들, 말투들, 사고 방식을 그 자신의, 아직은 물렁물렁하던 몸에 차곡차곡 담으면서. 그가 몸을 잊어갈 무렵 등장하는 티조와 팡슈는 몸에 가까운 사람들로서 그의 균형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며 덕분에 기록을 이어나갈 힘을 더해준다. 


그렇게 완성된 일기, 즉 글로만 이루어진 자신의 생의 기록(결국은 죽음에 도착하는 여정)을 딸에게 선물하며 “결론적으로, 이 공책들을 갖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그럼 아무 문제없을 거다.”는 말을 남긴 그의 모습은 마르케스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아버지가 자신의 죽은 몸을 전달하는 장면과는 대조된다. 어쨌든 이 일기도 문자로 이루어진 그의 몸, 이나 다를 바 없으니. 이 메시지를 남기는 순간의 그는, 마음껏 윤곽선을 그어대던 자신의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이 이야기는 소설이지만, 어쩌면,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내 손에 잡혀 있는 ‘책'이라는 구체적인 물질은 그의 다음 세대, 그가 ‘열렬히 사랑했던' 딸이 덧댄, 그녀만의 시각으로 그려낸 또 다른 윤곽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색이 칠해지지 않은 빈 곳에도 얼마든지 윤곽선을 그릴 수 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텍스트도 책이 될 수 있다, 픽션들이 그렇듯이. ‘도도'가 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일의 일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름과 외양이 다른 수 많은 ‘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를 꾸려낸 이 ‘일기'라는 기록은 나의 기억과 감각에 의해서 재구성되며, 그것을 다시금 끄집어 정리하는 것도 나 자신인만큼 종내에는 내 목소리가 끼어들거나 무의식적인 편집이 더해지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일기는 가장 가까운 데서 만들어내는 소설이 아닐까. 이 일기에 등장한 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일기 속의 ‘내'가 지향하여 담았던 혹은 거부하는 과정에서 옮아버렸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조각조각 모이다보니, “솔직히 난 내가 뭐와 닮았는지 도저히 말할 수 없을 것 같다(p.184)”는 말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결국은 일기이지만 일기가 아닌 것. 


매일의 기록이 몸에 새겨지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그의 어린 시절에 등장하는 로베르처럼 “그의 몸과 그의 정신은 함께 자라”난 경우가 아니라면은, 얼핏보기에 반복적이며 구별되지 않는 매일로 채워진 생이 대부분이다. 그 날들을 '더욱 활기찬 생, 더욱 열정적인 생, 더욱 노력하는 생'으로만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애도와 회고의 틈을 마련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 취할 수 있는 간단한 행동이 '기도'와 ‘일기' 외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잠시 고민해보았지만 마뜩치 않은 것들만 떠오른다. 그러다 1924년도에 태어나서 2010년도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표시된 책 속 일기장의 연도를 보며, 1920년에 태어나 2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했다.


그녀가 떠나는 때에, 그녀가 남긴 글자는 없었다. 대신 곁에 있던 때의 그녀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주변의 혼란을 정리해나가며 매일의 다름을 꾸려갔다. 문자를 배운 적이 없어서 오로지 몸만으로 존재했던 그녀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의 경험을 들려주곤 했지만 그녀가 정신이 멀쩡할 무렵에는 그 이야기를 듣기에 내가 너무 어렸고, 내가 그 이야기를 궁금해 할 무렵에 그녀는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까지도 잊지 않고 노래했던 ‘북망산천'은 모든 지형지물이 사라져도 그녀를 그리로 안내하도록 프로그램된 나침반과도 같은 무엇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반드시 문자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떠난 자가 남긴 이야기들과 목소리들에 의지한 채, 오늘의 나는 꾸준히 윤곽선을 그려가고 있다. 나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고 재해석된 모습으로 내 삶에 다시금 등장하곤 하는 수 많은 사라진 몸들에 비하자면 나는 행위에 비하여 기록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매일매일의 죽음을 애도할 틈을 찾기 어려운, 매일매일 생의 찬란함만 바라보는 무언가를 써내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YKSQZME(익스큐즈미)

잡종.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밥.’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 밥을 여기저기 퍼나르는 방법은? 미디어.’ 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디어를 더불어 공부했다. 밥을 실어나를만한, 마음에 쏙 드는 미디어를 찾아 헤매다보니 기획자와 교육자와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잇는 사각형 안팎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편식 및 리셋 증후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Excuse me하며 사과할 일이 많다.



2015년 11월 3일의 모임 후


왜 소설을 읽는 것은 이토록 힘이 드는 것일까? 짧게 소화하기에는 벅찰 정도로 다가오는 어떤 이의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촘촘하게 뼈가 들어찬 생선을 발라먹는 기분이다. 그것은 좀체로 한 입에 우적우적 씹어먹을 수는 없는 어떤 것이다. 완벽함으로의 전진이 아닌, 고장난 기계를 어떻게든 써보려고 애쓰는 것이 인간으로서 평생토록 감내해야 하는 숙명이라면, 그 고장 내역과 고쳐진 내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돌아오는 길에 했다. 몸이 기계 같은 것이라면 때때로 돌아가는 엔진 없이, 텅 빈 상태로 몸만 그 곳에 머물기만 하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외부에서 밀려오는 충격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도 가끔은 자신을 멈추도록, 비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