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유

 

글을 쓰지 않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언제나 쓰고 싶었지만 좀처럼 써지지 않는 글들 앞에서 항상 머뭇거렸고, 이내 다른 글들을 읽는 것으로 쓰겠다는 마음을 묻어두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읽기만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을 글로 논리정연하게 펼쳐보고도 싶었고, 그게 안 되면 대화를 통해서라도 내 느낌을 전달해보고 싶었다. 그건 아마 읽기만 하고 끝내는 게 아닌, 무언가를 생산해내고 싶은 나의 욕구였을 것이다. 욕망이라 할 것까지도 없는 그냥 욕구. 하지만 무엇이 그토록 힘들었기에 손만 움직이면 되는 글쓰기를, 간단한 욕구의 충족을, 나는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이 물음 앞에서 자꾸만 작아졌다. 나태함, 귀찮음,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눈앞을 맴돌았다. 글을 쓰는데 소모되는 많은 에너지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고, 그게 나태함, 귀찮음으로 이어졌음을, 그래서 쓰고 싶다와 피곤하다의 중간에서 계속 갈팡질팡했음을 알았다. 그래서 필요한 게 동기였다. 두려움은 함께하면 충분히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음을 알았기에 꼭 그만큼의 동기가, 말 그대로 동기(同期)가 필요했다. 때문에 찾은 게 세 계절 읽기 모임이었다. 대학 시절 즐겁게 들었던 수업의 선생님이신 김대성 평론가님과 책을 읽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과의 모임이라면, 얼마나 신날까, 재밌을까, 하고.

 

2. 나목

 

모임 참가를 결정하고 나서 읽고 이야기를 나눌 책이 박완서 작가의 『나목』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약간 웃음이 났다. 언젠가 꼭 읽어야지 다짐만 하고 읽지 못했던 작가가 박완서였는데 마침 읽기만 하고 쓰질 못하는(생산해내지 못하는) 처지인 나와 이런 식으로 겹칠 줄이야. 이것도 우연이려니 생각하니 되레 기분이 좋아졌고, 출발부터 한 발 앞서나간 느낌이 들었다.

사실 여태껏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재미가 없어 보여서. 제목부터 그랬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같은 심심한 제목은 책을 고를 때 눈 밖에 나기 마련이었다. 이번에 읽을 책도 마찬가지로 『나목』이란 뭔가 심심해 보이는 제목이어서, 어쩌면 책을 읽어 나가기가 조금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신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는데, 그 시작은 아래 문장으로부터였다.

 

여자와 남자가 이루는 풍경, 거기엔 적어도 춥지 않은 무엇이 있었다. 저들도 춥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추운 김에 아쉬운 대로 옆에 있는 옥희도 씨라도 좋아해볼까 하는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하느라 별로 무섭다는 생각도 없이 어두운 길목을 지났다.

- 박완서, 『나목』, 세계사, 2012, p.35~36

 

이 문장 앞에서 내가 떠올린 건 ‘버팀’이란 단어였다. 어떤 낭만적인 사랑이 아닌 그저 버티기 위해 하는 사랑. 그런 버팀을 위한 사랑이야말로 전시란 상황에 꼭 필요한 사랑이 아닐까? 그리고 사실상 전쟁과 다름없는 혼란한 상황에 놓여있는 지금의 수많은 젊은이들(개인적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은 언제나 전쟁상태에 놓여있었던 것 같다)에게도 꼭 그만큼의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지만 나를 헷갈리게 하는 건 뒤에 나오는 이경의 태도였다. 정말로 이경이 아쉬운 대로 사랑을 해볼까 싶었다면 자기를 좋아해주는 남자인 태수와 충분히 사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헌데 왜 그녀는 태수와 함께 걸으면서 “걸을수록 점점 더 추워져서 이가 맞부딪힐 만큼 떨려왔다”(p.113)라고 말했나.

이제 나는 얘기를 조금 돌릴까 한다. 위에 나타난 이경의 태도는 너무 모순점이 많다. 게다가 원체 이경이 소설 속에서 방황을 많이 하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인물이여서(청춘의 표상) 그녀의 감정적이고 일회적인 말과 서술을 그대로 믿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그녀의 지속적이고 특정한 행동에 초점을 맞춰볼까 했다.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어머니를, 더 나아가 근대 여성(의 상처)을 구원하고 싶어 한다고 말이다.

알고 보면 그녀는 옥희도와 함께 있을 때 어머니에게 가야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쩌다 말을 해도 “난 불쑥 생각지도 않던 소리를 했다.”(p.112)는 식으로 변명을 한다. 그러니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옥희도와 함께 있을 때는 어머니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옥희도와 어머니를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옥희도를 상징하는 색인 회색과 어머니를 상징하는 색이 같다는 걸 비롯해 고독이라던 지 허虛의 개념은 둘을 충분히 겹쳐볼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이경은 옥희도와의 만남에 상처를 입을 때마다 도리어 그녀의 어머니(의 상태)를 고치려든다.

 

나는 와락 모멸을 느끼고 쏜살같이 혼자서 길을 건넜다. 그리고 그가 보이지 않도록 여러 골목을 꼬부라진 후, 한꺼번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 지독한 반쪽의 슬픔과 허기증에서 어떻게 하나가 되는 환희와 포만을 얻는 것일까고. 어떡하면 가끔 엄마의 딸이 되기를 그만둘 수 있을까고. 어머니한테 의치를 다시 끼우게 할 수는 없을까고. 그렇지, 의치를 끼우게 해야지, 강제로라도 내가 어머니의 딸인 게 아무리 거북해도 못 면하듯이, 엄마도 거북한 의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라.

 -p.217

 

하지만 끝내 이경은 옥희도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알아채지 못하고, 어머니의 상태도 회복시키지 못한다. 그 둘은 자신의 상처와 고독을 남들과 나누길 끝까지 거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머니와 근대 여성(의 상처)을 구원하는데 실패한 소설인가? 일단은 그렇게 보여진다. 이경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죽고 싶다와 살고 싶다의 반복을 어머니를 죽이고 싶다와 살리고 싶다로도 읽을 수 있다면 그녀는 결국 어머니를 죽이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옥희도와의 관계도 끝이 나고 만다.)

나는 태수를 내 방으로 청해 들었다. 알맞게 따습고, 고즈넉하고 은밀한 내 처소로. ‘亞’자 창과 덧문까지 첩첩이 닫고 나는 그에게 안겼다. 나는 그의 것이 되었다. (p.366)

 

결국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모든 것을 이루지 못한 채 태수의 아내가 되고 만다. 이것은 현대여성의 출발점이라고도 보여지는데, 이는 그녀가 태수와 결혼한 뒤 근대로 상징되는 "고가를 철거해버리고 (현대로 상징되는) 견고한 양옥을 짓"(p.370)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는가? 모든 걸 체념한 채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식으로? 하지만 그렇다면 어머니를 살리겠다고 의원으로 뛰어가던 이경의 뒷모습은, 어머니에게 몇 번이나 약을 먹이던 그녀의 분주하던 손은, 왜 나에겐 끝내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겨지는가.

그건 아마도 그녀가 잊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마음 한 켠에 영영 떠나보내진 않은 채 품고 있던 그 노오란 은행나무 때문이겠지. 낙엽이 지고나면 언제나 시리고 시렸던 겨울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 참담한 시절을 버텨냈던 나목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p.376

 

3. 후기

 

아직도 중앙동 업스테어에 가던 길이 생생하다. 얼마 만에 느껴지는 긴장과 설렘인지 꽤나 먼 길이었음에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안에 들어가니 보이는 건 꽤나 작지만 따뜻한 장소와 꼭 만나보고 싶었던 김대성 선생님 그리고 모임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금은 머뭇거렸는데, 김대성 선생님과 모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떤 말을 해도 잘 들어주고 이야기를 나누어 갈 거란 생각이 들어 자연스레 입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선생님께서 주신 노트에 적힌 질문인 ‘우리 옆의 시체는 어떤 모습인가. 시체 옆의 우리, 오늘의 겁쟁이는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새삼 놀라웠다. 나는 이 질문을 보고 “전쟁의 비극은 철로 된 무기나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죽은 연인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젊은 여성의 젖은 눈동자 같은 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전쟁이 없었다면 당신이나 나만큼만 울었을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 그 자체니까.”조해진 「빛의 호위」라는 문장이 떠올라 그저 시체는 남자, 그 옆의 우리는 여자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남자가 하는 전쟁에서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건 결국 여자들이니까. 하지만 또 다른 의견인 ‘전쟁과 남자는 살아서도 여자를 주변부로 죽어서도 여자를 주변부로 만든다. 즉 남자(가부장)는 여자를 항상 시체로 만든다.’란 의견은 나의 단순한 생각을 다시 한 번 돌아 볼 수 있게 해주어 놀랐다.

모임이 끝난 뒤에 석기시대라는 장육을 싸게 먹을 수 있는 곳에서 뜻하지 않게 술까지 먹을 수 있게 되어 더 좋았다. 다음에는 꼭 선생님과 모임사람들과 함께 치킨도 먹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래본다. 그리고 그땐 좀 더 오래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이 즐거웠던 경험을 ‘사람과 사람이 이루는 풍경, 거기엔 적어도 춥지 않은 무엇이 있었다.’라고 조심스레 바꿔 말해도 될는지. 정말 그곳엔 적어도 춥지 않은 무엇이 있었으니까.

 

(2015. 11. 22)

 

박세진

어린 시절 벽에 걸린 별과 산을 봤다. 언제고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15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