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절 읽기 모임 3회, '나목(박완서, 2012)'

'시작' 이전에도 무엇인가가 있었을까? 아무것도 없는 지평 위에 ‘처음’이라는 것이 놓일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처음'이라고 부르는 시점의 이전을 동양과 서양에서는 하나 같이 ‘혼돈'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왔었다는 것을 떠올려본다. 홀로 즐거울 줄 알았던 중국 신화 속에서의 ‘혼돈’과 벌어진 입 속의 어두움과 공허의 의미를 담고 있는 그리스 신화 속 ‘카오스', 두 ‘혼돈'의 빛깔은 다를지언정 사람들이 나름의 질서를 더하기 이전의 세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질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혼돈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듯한 오래된 이야기의 전개와 반복,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질서를 세우기 전에 온 힘을 다하여 혼돈을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주인공인 이경은 한바탕의 무질서가 휩쓸고 간 도시에 돌아와 살아가며, 사람들의 목구멍 너머에서 그 도시에 가득 차 있을 허를 발견한다. 개인의 힘으로 어쩔 도리 없이 손놓고 바라봐야만 했던 어떤 기억이 해체되는 순간을 경험한 사람들은 물론 그 기억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던 사람들에게까지도 폭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수 많은 한국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천사 같은 세 딸과 착한 아내와 맑은 날씨와 푸른 잔디밭의 기억을 자신에게서 분리시키고, 혹은 ‘걸 프렌드'들과 자신을 멀리 흩어놓아야만 하는 미군도 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아파하고 있지만, 그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없기에 함께 아픔을 덜 수도 없다. 함께 만든 기억이라는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기억을 든든히 둘러싸고 있을 관계가 해체되는 순간 파편화되기 쉬운 것이 아니던가. ‘미친 것들이 창안해 낸 미친 짓 중에서도 으뜸가는 미친 짓’인 전쟁이 부른 결과 - 공허함이 서울의 모든 곳에 흩뿌려져 있는 시대를 이경의 눈을 통해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공허 위에 질서와 시간을 더해가는 ‘누군가'의 상징으로서의 이경을 본다. 


시작에도, 끝에도 매듭이 필요한 바느질처럼, 그녀는 이야기 내내 어떠한 매듭을 짓기 위해 움직이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것이 시작을 위한 매듭인지 끝을 위한 매듭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두명의 사람 만이라도 관계로 맺어져있다면 그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기억의 공유지가 생겨날 수 있다. 그것은 공허한 땅과는 다른, 작은 질서가 더해지기 시작하는 땅이다. 나는 그러한 영토를 또는 관계를 이경이 찾아나서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기실 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모두, 어떠한 매듭을 만들어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적어도 이후를 살아나갈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경은 그녀의 어머니와 1차적인 관계인 모녀로서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기름이 배어나오기 딱인 빈대떡을 옷 안에 넣어 식지 않게 집까지 가져오는 순간은 서글프기까지하다. 어머니의 ‘공허'에 질서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것은 의치일 것이다. 번번한 좌절들, 그리고 또 다른 수 많은 이들과 관계 맺기에서 생겨나는 좌절들의 저변에는 그녀 자신이 아직 정돈하지 못한 기억들이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서 망가져버린 그녀의 기억은 ‘이지러진 지붕'과 ‘부서진 기왓장', 그리고 구멍이 뚫고 지나간 ‘용마루'로 구체화된다. 이 곳은 그녀 스스로도 직면하지 못하는 어떤 기억이고, 그래서 다른 누군가에게 먼저 보여주어서는 더더욱 안되는 어떤 장소일 것이다. 그 곳에는 이경의 어머니라는 가장 큰 공허가 있다, 정리되지 않은 기억이 있다. 본의 아니게 또 한 번 기억의 해체와 재구성이 이루어지는 것을 철저히 막아두지 않으면 타인의 일상적인 배려조차 그녀에게는 다시금 폭력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런 이경이 안타깝다. 


옥희도씨 역시 남한으로 내려온 이후에 삶의 매듭을 새로이 엮어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이지만, 개개인이 자신의 매듭만을 생각하기에 급급한 때에 이경을 유일하게 ‘가엾게' 여길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이경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는 장소이자 그 곳을 ‘집'이라고 부를만한 이유 중 하나가 될 듯한 ‘은행나무'처럼, 그는 이경이 의지하는 ‘사람 나무'가 된다. 그들이 만든 기억의 공유지가 찬란하거나 견고하지는 않지만, 발을 얹을 수 있는 지대가 되어준 것만은 확실하지 싶다. 예술가로서 그림을 그리겠다는 결심을 하는 장면에서, 겨울 아침의 살얼음판처럼 얇은 기억의 겹을 딛고 서서 비로소 캔버스 앞에 이른 한 나이 많은 남자를 발견한다. 


이경은, 어쩌면 ‘시간’이자 ‘질서'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신화 속에서도 혼돈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것은 ‘시간'이라는 개념의 유무에 달려있곤 했다. ‘시간'이 들어서는 순간, 이전에 있던 모든 혼란스러움은 질서로 대치되고 공허는 뒤켠으로 밀려나버린다. 옥희도씨는 생동감 있는 색깔로서 이경을 유심히 바라보았을 뿐이었고, 그녀가 그와의 관계에 질서를 더하려 할 때가 되어서야 그는 그녀를 제대로 바라보게 된다. ‘신기루'나 ‘환각'이 깨어나는 순간에, 예술 속에 들어서기 어려운 것들이 보인 것인지도 모르겠다.(노래와 춤을 즐기던 중국 신화의 혼돈은, 그 막힌 구멍이 답답해보인다며 구멍을 뚫어주는 두 친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 두 친구는 각각 시간을 상징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는 이경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지점'으로 존재하게 된다. 분명 튼튼한 뿌리가 있는 지점이니, 이후에 바람이 아무리 분다한들 누구나 그 곳을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기대어 설 수 있는 나무 곁에서 이경은 비로소 자신의 질서를 더해나갈 힘을 되찾았다고 생각해본다. ‘고아들'처럼 도시에 머물던 태수와 함께 기억의 공유지를 만들기 시작한다. 영원한 ‘허'일 것 같았던 어머니는 질서의 세계가 도래할 무렵, 혹은 자기 스스로 혼란을 종식시킨 채 사라지고(“흠잡을 나위 없는 완벽한 정돈, 그러나 거긴 통 생활의 냄새가 없었다. 한기가 돌았다. 그것들은 아버지와 오빠들의 유품인 동시에 어머니의 유품인 것도 같았다”), 두려움으로만 남아있던 직면하기 어려운 기억들은 태수의 도움으로 함께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기준이 될 한 그루의 나무 뿐, 그리고 옥희도씨의 그림 속의 나무 뿐. 누구라도 발견할 수 있는 명징한 지표는 그렇게 전쟁 후의 혼란을 개인적으로나마 마무리하는 기준점이자 의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이야기 속의 기억들은 이경의 것만도, 태수의 것만도, 옥희도씨의 것만도 아닌, 등장하는 모든 인물 중 ‘누군가’가 혼자만 가질 수는 없는 공통의 기억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 잎을 모두 털어낸 채 추위를 견디며 새 봄을 위해 묵묵히 서 있는 나무에게 뿌리 대신 다리가 달렸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얄궂은 상상을 해 본다. 모두가 조금씩은 관계 맺고 있는 기억의 공유지로서의 역사가, 자신을 안위를 위해 조금이라도 자리를 움직이는 순간, 이미 그것은 역사도 나무도 아니게 되겠지. 




책을 읽고 남겼던 글대궁 포스트의 뮤직비디오는 그 장면들 또한 계속 나목을 생각나게 했지만, 노랫말 역시도 이경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복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간단히 한국어로 바꿔 쓴 가사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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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텅 비어버린 땅을 가로지르며 걷고 있었어요 

그 오솔길을 나는 환하게 알고 있었죠 

발걸음 아래로부터 세상을 느끼기도 했고 

흐르는 강물 옆에 앉아 있을 때 내가 완전해지는 순간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어디로 가버렸나요, 

나는 점점 지쳐만 가고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해요 

길을 걷다 쓰러진 나무 한그루를 보았는데 그 가지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여기가 우리가 정말로 좋아했던 장소가 맞나요, 여기가 내가 그렇게 꿈꿔왔던 장소가 맞나요. 

나는 점점 나이를 먹고 있고 기댈 수 있을 무언가가 필요해요 

잠시 시간을 내어 줄 수 있다면 그 곳에 한 번 가보는 게 어떨까요 

우리만 알고 있는 그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는 거예요 

아마 그게 모든 것을 끝내버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점점 지쳐가고

시작할 장소가 필요해요 


 -Lily Allen, Somewhere only we know


YKSQZME(익스큐즈미)

잡종.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밥.’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 밥을 여기저기 퍼나르는 방법은? 미디어.’ 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디어를 더불어 공부했다. 밥을 실어나를만한, 마음에 쏙 드는 미디어를 찾아 헤매다보니 기획자와 교육자와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잇는 사각형 안팎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편식 및 리셋 증후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Excuse me하며 사과할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