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 간 내가 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본 결과, 내 주변의 인류는 스스로 멸종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기를 보면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결혼만 하면 10명은 낳을 거라던 친구는, 실제로 결혼을 하고 나니 아이 낳는 것의 무게감을 실감하고, 1년 후로 미루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 첫 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다른 친구는, 육아와 자신의 경력단절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나의 바로 맞은 편에 앉았던 어떤 이는, 자신은 부모님과 같은 희생을 감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에 자녀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망설여진다고 말했다. 친구로부터 청첩장을 받으며, 결혼 2년차에 접어든 한 친구의 소식도 접했는데, 그녀는 싸지르는 것 같은 출산에 반대하며, ‘가풍'이라는 것이 다듬어진 후에서야 비로소 자녀를 낳아 올바르게 키울 거라는 소식이었다. 굉장히 그녀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 쯤 되니 내 주변의 인류들은 출산을 꽤 심각하게 여기고 있고, 삶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것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세상의 모든 아이와 어린 것들은 귀엽고 앙증맞지만, 태어나자마자 네 발로 서서 젖을 빠는 얼룩말과 달리 사람의 아이는 꽤 많은 애정과 관심을 필요로 한다. 하드웨어적으로도 물론이거니와 소프트웨어적으로도 이전의 인류가 구축해 놓은 시스템과 지식의 축적량이 상당하여 긴 시간의 학습이 요구된다. 많은 문화권에서는 18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자정이 넘은 시각에 두 발로 서서 홀로 돌아다니거나 음주를 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시 하지 않는다.


부모가 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업에 대한 애정도 유지해가면서, 양육을 위한 시간에 쏟아야 하는 관심과 사랑은 모자랄 수는 있을지언정 충분하기는 어려운 편이다. 뉴스나 신문에서는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 받지 못해서 연이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매일 한 건 이상은 보도되며, 자라나서 자신이 꾸린 가정에서조차 충분한 사랑을 공급받지 못하자 서로에게 분을 푸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한 밤 중에 욕설로 들리는 많은 이들의 다툼이 이해되지 않을 때에는, ‘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하고 있어'로 번역해서 들으면 대충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이야기를 한 번 이상 접한 사람이라면,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데에 책임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한 주간 자발적 멸종의 가능성을 내비친 이들은 과연 내가 그 사랑을 쏟을 수 있는 상태인가, 를 계속해서 탐색하며 점검하고 있는 셈이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고민이 많았다. 자신을 충족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부족하다는 이들도 있었고, 자신이 의도치 않게 투약한 약들, 바쁜 생활 속에서 몸으로 스며 들어온 합성첨가물 등으로 인해 자녀의 몸에서 그 흔적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두려운 일이라는 고백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높은 인구 밀도 속에서 벅차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경쟁적일 것이 분명한 미래의 삶을 새로운 존재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회사에 내는 사표나 휴직도 고민을 해야 낼 수 있는 것인데, 부모 사표, 부모 휴직 같은 것은 생후 18년은 지나야 욕 먹지 않고 낼 수 있다.


올 봄 부활절, 흔히 주는 삶은 달걀이 아닌 유정란을 교회에서 받았다. 떨리는 손으로 박스와 램프로 부화기를 만들어 열심으로 돌보았다. 가족들은 한 편 기대했지만, 한 편으로는 정말 태어나면 어쩌냐며 걱정을 멈추지 않았다. 배운 적도 없는 어미 닭 노릇을 하느라 7시간 간격으로 알을 굴려야해서 잠도 잘 못자고, 외출도 잘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 상황을 구즈렁구즈렁 늘어놓는 나에게 엄마는 일침을 놓았다. “병아리가 태어나면 삐약삐약거리면서 ‘너는 왜 나를 태어나게 한거야, 그냥 태어나기 전에 죽게 두지' 라고 화 낼 걸.” 엄마의 말에는 굉장한 설득력이 있었고 찌릿함이 있었다. 덧붙여 엄마의 유년기의 기억 한 구석을 나도 모르게 엿 본 것 같아서 머쓱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초보 부화자의 어설픈 실력 덕에 병아리는 결국 태어나지 못했다.



이러저러한 고로 현재의 상태가 유지된다면 나는, 아마도 인류의 멸종에 가담하지 싶다. 하지만 이미 태어난 이들 중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이가 있다면, 그들이 손길을 요하는 만큼 일정 기간 돌보아 주는 것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하나씩 아이들이 줄어가는 과정은 내게 재미있는 상상들을 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가족의 개념이 넓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모두가 출산하지 않아도 한 공동체에 몇몇의 자녀만 있어도, 함께 사랑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니 것은 니 삶이면 충분하고, 내 것은 내 삶이면 충분하다’ 하며 부모와 자녀가 조금은 떨어진 관계로 머무는 것은 불가능할까. 그제서야 비로소 인간을 인재니 무어니 하며 투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냥 제 의지대로 사는 주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텐데. 나 역시, 동네 할머니나 동네 언니, 오빠, 동생들과 함께 놀았던 짧은 시기가 있었기에, 공동체가 주는 사랑은 부모에게서만 받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혹시 아는가, 공동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개인의 삶보다는 공공의 삶을 앞서 생각하고 있는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될지? ‘공공(Public)’이라는 단어도 떠올리기 전에, 그 사람들이 자신에게 사랑을 준 가족이었음을 먼저 떠올리게 될 테니까. 가족 이기주의에 맞서는 방식이 가족의 해체가 되서는 곤란할 것이다. 어차피 인간이 이기적이라면 해체 이후에는 이기적인 개인이 지상을 점령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도리어 아주 큰 가족이 되어버린다면 어떨까.


나는 스스로도 놀랄만큼 개인주의자이지만, 흩어지고 다시 합치는 가족의 즐거움을 하우스메이트들과 함께 경험했었다. 거실과 부엌과 욕실을 나누지만, 자기만의 방은 분명히 존재하는 삶. 개인과 개인이 함께 산 적도 있지만, 어떤 때에는 부부 혹은 어떤 가족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함께 삶의 영역을 공유한다는 것은, 홀로 지내며 익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배움을 주었다. 가족과 가족은 왜 함께 살 수 없는 걸까, 나는 가끔 그것이 궁금하다. 가족끼리 서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주 많을텐데. 어쩌면, 배워야 할 것이 많을텐데.



여행을 하던 중에 바르셀로나에서 머무는 기간이 마침 그 도시의 디자인 위크와 겹쳤던 적이 있다. 가우디의 건축물들로 유명한 구시가는 테마파크스러운 느낌이 가득하도록 꾸며져있지만, 디자인 위크의 중심지는 신시가 쪽이었다. 구시가와 신시가를 연결하는 중간 지역은 노후화되고 낙후된 도시의 느낌이 강했다. 신시가에 들어서자 개개인의 공간인 낡은 집들에 비하여 깔끔하게 다듬어진 공공 공간의 대비가 더욱 뚜렷하게 느껴졌다. 마침 Urban Living Room이라는 설치 작업을 한 켠에서 발견했다. 푸르스름한 톤으로 모두 칠해져 있었지만, 테이블과 가구 등을 재현해 둔 쇼룸 같은 거실이 있었다. 벽도, 집 주인도 없는 공간은 도시 속 공원의 메타포 같기도 했다. 집에서 가지고 나온 기타를 연주하는 청년, 마실 나온 듯 가볍게 책을 읽고 있는 이도 있었고 그들을 그리는 나도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물어보니 그들은 작가도 작품 지킴이도 아닌 동네 사람들이었는데, 어쩌면 개인의 공간보다 공공의 공간을 잘 가꿔두면 사람들은 비로소 광장에 나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긴 시간을 합숙하다시피 일하며 지냈던 친구들과는 공동 부엌에서 끼니 때마다 밥을 종종 해먹곤 했는데, 밥 먹을 때마다 농담조로 하던 이야기가 있다. “가족이 별건가, 삼시세끼 같이 먹는 우리 몸 안의 혈액이나 단백질이 더 닮아가고 있을 걸?”. 그들과 종종 서로가 생각하는 미래상을 그리곤 했었는데, 그 때 주로 언급되던 단어는, 뜬금없지만 ‘테러'였다. 홀로 성공하여 철옹성 같은 담을 쌓은 영역에서 지킬 수 있는 안전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그 담 밖을 한 걸음만 걸어나가면 테러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것은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생각들을 나누었다. 차라리 담을 높일 돈으로 차라리 온동네가 잘 살 방법을, 당장은 어렵더라도 시작해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해왔었던 것을 비로소 되새겨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는 우주 재개발 계획에 포함된 지구를 떠나는 돌고래들이 부르는 ‘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라는 노래가 있다. 돌고래들의 자발적 멸종을 이 곳 저 곳에서 보도하지만, 결국은 그 이유를 알아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사라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못 살겠으니까 혹은 못살게굴어서 사라지는 거 아닌가. 인간이 사라지면 그들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번성할 것이라는 날 선 농담을 되새겨본다. 결국 나는 자발적 멸종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해, 웃기보다는 심각한 얼굴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015.10.13.생활-글-쓰기 모임 2기 1회


YKSQZME(익스큐즈미)

잡종.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밥.’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 밥을 여기저기 퍼나르는 방법은? 미디어.’ 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디어를 더불어 공부했다. 밥을 실어나를 마음에 쏙 드는 미디어를 찾아 헤매다보니 기획자와 교육자와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잇는 사각형 안팎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편식 및 리셋 증후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Excuse me하며 사과할 일이 많다.